장영기(張英基)는 1888년에 서울 서소문 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의 이름 김마리안나가 세례명으로 보여 그도 서울에서 감리교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18세였던 1905년에 어머니와 동생 장영진 등 가족과 함께 멕시코에 이민했다. 4년간의 노동계약이 끝나면서 1909년 5월에 자유의 몸이 되었고, 그달 12일에 메리다 지방회관에서 메리다 한인감리교회가 설립되면서 그의 가족이 본 교회에 등록했을 것 같다.
1911년 4월에 메리다 지방회가 있었을 때 신입회원으로 장영기가 소개되었는데 이는 멕시코 이주 후 6년 만이었고, 두 번째는 1918년 11월에 메리다의 오스따바깜 지방에서 청년 토론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는 보도에서다.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난 다음 달인 1919년 4월 29일 자 신한민보에 장영기 어머니의 나라사랑이 다음과 같이 게재되었다:
“당지에 거류하는 장영기와 장영진 양씨의 대부인 마리안나 김 씨 노인은 당년이 근 6순인데 또한 신병이 있어 하루도 편하지 못한 노인인고로 더욱 그 자제들이 위하여 생신잔치를 베풀려하였는데 그 부인이 만류하고 그 자제를 불러 말씀하되 지금이 어느 때냐? 조반석죽도 두려운 터이니 우리 민족 전체가 빈 손들고 일어나 독립 자유 코져 전쟁하는데 주리고 헐벗음이 형언치 못할 때라. 이 때에 생일이란 다 무엇이냐? 너희는 나라를 위하여 생명과 재산을 다 희생하여라. 충정을 들어 말씀하셨다러라.” 이듬해 5월 1일에 메리다에서 그의 가정에 딸이 태어나 기뻤으나 동포 이원근이 별세하는 슬픔도 있었다.
생활난으로 살길을 찾아 1921년 3월경에 남녀 동포 200여 명이 제2고향인 멕시코를 떠나 쿠바로 이주하였을 때 장영기 가족도 함께했다. 그해 10월 5일에 한인동포 중에 감리교인과 안식교인이 있었으나 교파를 고집하지 않고 한인감리교회를 설립했다.
1923년에 장영기가 국민회 맛단사스 지방회의 총무에 선임되었다. 그해 5월, 전염병으로 어린아이가 고생할 때 박수길이 취중에 어저귀 따는 칼로 김덕순을 해하려 할 때에 장영기가 그 칼을 빼앗으려고 하다가 두 손가락이 중상을 입었는데 지방회는 박수길을 잡아 벌금 25원과 징역 3개월에 선고했다. 이런 중에도 이흥식 부인의 치료비, 국민대표회 대표 경비, 의무금, 내지 수재 구제금을 냈다.
1924년 1월, 맛단사스 지방에 남자 34명, 한국 부인 11명, 멕시코 부인 4명, 소년 15명, 소녀 11명, 멕시코 부인의 소생으로 소년 2명과 소녀 4명이 거주했다. 그해 3명이 태어났고, 사망도 3인이었으며, 입경동포와 환국동포가 각각 한 명이었다. 그해 우연히 미국감리교회가 파송한 알미라 B. 터커 여선교사(대허 부인)가 한인교회를 찾았는데 터커 여선교사의 지도와 원조를 많이 받았다.
장영기가 갈데라로 이주한 1924년의 4월에 아들이 태어나 경사였으나 그해 9월에는 딸이 사망하는 슬픔도 있었다. 1925년에 칼데라 지방회 총무로 선임되었다. 그해 2월에 칼데라 지방회관에서 국민회 창립 제16주년 기념식이 있었는데 지방교회 집사로 소개된 것으로 보아 맛단사스 한인감리교회 집사로 보인다.
1925년 11월에 장영기는 모친을 보살피기 위하여 맛단사스로 돌아갔다. 맛단사스지방회 총무로 선임되었던 1926년의 3월부터 선교부에서 매월 25달러씩 후원하였고, 터커 선교사를 전도 부인으로 파송하여 예배를 인도하였다. 1927년에 그가 맛단사스지방회 회장에 취임하면서 구제방침을 정할 때 병의 경중을 따라 경하면 1삭 동안에 4원, 중하면 7원을 지출하고, 별세하는 경우 25원을 특연하여 구조하고, 잡기와 페언 망설과 거룩하지 못한 행동을 할 때 벌금 5원을 당석에서 받되 만약 못 내면 벌금을 낼 때까지 징역을 시키기로 했다.
1927년 5월 5일자 신한민보에 장영기는 터커 여선교사(대허 부인)를 소개했다. “맛단사스 지방에 처음으로 세운 중앙기독교학교에 총무로 시무하는 미국인 대허 부인은 우리 한인동포에게 많은 동정과 사랑을 베푼다함은 본보에 수차 보도하였거니와 이제 다시 대허 부인께서 한인 중 젊은 남녀의 덕, 체, 지의 삼육 발전을 위하여 정신력과 물질력을 다하심을 여기 잠간 소개하고자 하나이다. 물론 대허 부인께서... 우리를 심방하고 삼일운동 당시의 사실을 자세히 소개하여주셨으므로 우리는 비로소 본국형편을 소상히 알게 되었다. 그 후 종종 다른 전도 부인과 목사들과 같이 와서 전도하며 미진한 본국형편을 알렸고, 아동들의 교육을 권장키 위하여 지필묵 등을 우리 아이들에게 많이 기부하였으며 특별히 여자들에게 수놓는 법을 가르쳐서 금사 육사로써 우리의 금수강산 같은 것을 수놓게 하며, 찬송가를 가르쳐서 어린이 성음을 발달케 하셨다. 최근 2, 3주일 전에는 약 40원 가격이 되는 운동기계를 우리 아동의 유희당에 기부하셨다. 또한 요사이 본 지방회 재무 임병일의 부인 박후아가 신병으로 고통함을 보고 대허 부인은 5원의 동정금을 기부하셨다. 그뿐만 아니라 간혹 아동들에게 과자 등을 주어 어린이들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매 1주일 혹 2주일에 한 차례씩 우리를 심방하는 바 그 차비만 하여도 적지 아니합니다... 대허 부인께서 항상 말씀하기를 ‘한국의 금수강산을 사모하며 사랑하여 잊을 수 없다. 다시 그곳으로 가서 한국 형제자매들과 고락을 같이하고 싶다’하셨다. 13년 동안이나 정 들고 복음을 전파하던 한국을 잊지 못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맛단사스에 재류하는 우리 동포들에게도 사랑이 많으신 대허 부인은 깊은 인연이 있어서 수삭 전에 본국에 기별하여 구약과 신약과 찬송가와 기타 종교에 관한 서적을 청구하여 우리 교회와 야학교에 기부하셨다. 이제 대허 부인의 과거 약사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28세에 미국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된 6명중 하나로서 한국에 나아갈 때는 즉 1911년 8월이었다. 경성 사직골 사시는 김 목사에게 한국말을 약 6삭 동안 배운 후에 수표교 다리 예배당에서 약 반년 동안 아동교육에 종사하는 동시에 세례문답을 주장하셨다. 그 후 원산가서 교회 사업에 근무하실 때 그 부근 촌 학교에 다니며 약 3년간 성경과를 교수하셨다. 그 후에 춘천으로 이거하여 약 1년 동안 전도하던 그 때는 즉 1916년 10월이었다. 미국 계신 모친의 신병이 위중하다는 급보를 받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모친의 병 치료에 약 1년 동안 지성으로 뒷바라지하여... 효과를 얻은 후... 약 1년간은 미국 각처로 다니며 한국사정을 미국 교우들에게 소개하셨다. 그 익년에 또다시 한국 춘천에 건너가서 교회사업을 계속하다가 1년 후에 원산으로 가셔서 또 1년간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 다음에 경성으로 오자마자 삼일운동이 벌어졌다. 대허 부인은 독립 운동자를 두호하다가 왜 순사와 병정에게 무수한 고난을 당한 것도 그의 평생 역사에는 한 가지 영광의 특색인가 한다. 그리고 경성 시구문안 서대문동 근방 학교에서 약 5년간 성경과를 가르치면서 선교하였다. 각 학교에서 교수한 학생의 총수로 말하면 근 천 여명이나 된다는데 그 때에 대허 부인께서 신병으로 인하여... 미국에 와서 약 1년간 치료한 후에 다시 어느 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한 후 즉 1925년에 하나님의 명령으로 쿠바 맛단사스 지방으로 선교의 사명을 띠고 오셔서 과거 3년간 쿠바인 교회 안에서 영어를 가르셨다. 그러다가 신병으로 인하여 치료차로 미국으로 다시 회정하여 수술까지 하고 6삭 동안 치료한 결과 그 병이 쾌차하여 또다시 곧바로 건너와 각처 교회를 심방한 후에 지금 중앙기독교학교 총무로 시무중인데 연세는 44세더라.”
1927년 5월에 지방회 회장 장영기는 대허 부인의 사진을 신한민보에 관각하게 하며 동관 각자비는 본 지방회와 한인 교회에서 부담하기로 했다. 그해 6월에 민성 국어학교는 재정곤란으로 정학하였는데 6월에 개학하고 임원을 선정했다. 교장에 김덕순, 교사에 임천택, 간사에 고창덕이었고, 영어과의 임원은 교장에 양춘명, 교사에 대허 부인, 조교사에 림천택이었다. 1929년은 노동 공황이 심각한 가운데 한인은 40명 내외에 남녀 아동을 합하여 120명이었고, 1주일 노동값이 150원 정도에 그쳤다. 이에 박창운의 500원 기부로 구제상점을 다시 열기로 하고 물품매입 문서와 자금이익 등 문부는 총무 김덕순이 간수하고, 문부검사원으로 장영기가 선정되었다. 5월에 장영기가 교장을 역임했던 민성학교 진급식이 있었고, 11월에 장영기 권사의 주례로 남녀아동 100여 명과 40여 명의 외국인이 참석한 가운데 33세의 박희성과 17세의 이놀아가 반 한국식 반 서양식으로 결혼했다.
1929년 쿠바 동양구역연회가 조직돼 목사안수 받고 한인감리교회 담임
1933년 터커 선교사와 다툼으로 사임, 맛단사스 한인안식교회 조직해
맛단사스 한인감리교회 목사
1929년에 쿠바 동양구역연회가 조직되면서 연회의 결의로 맛단사스 지역의 프로르 S. 레이나 목사를 한인감리교회 담임목사로 파송하면서 한국교회의 우수성에 박수를 보냈다. 그래서 한인교회가 이곳에 세워진 지 8년이 되던 1929년 10월에 장영기가 목사로 그리고 방경일, 이우식, 차희관, 고창덕, 태덕일, 호근덕을 집사로 선임했다. 교인은 53명이었고, 주일학교를 조직하였는데 25명이 등록했다. 그해 성탄절 이브에 처음으로 성찬식이 있었다. 이듬해 1월 16일의 신한민보는 ‘맛단사스 한인교회의 서광이 새로워, 목사는 장영기 씨요 집사는 7인’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당시 상황을 알게 된다.
“...이 나라 형편이 또한 각색 직업과 노동이 곤란함을 따라 일반 교우들의 물질력이 박약한 관계상 교회발전이 못 됨을 항상 유감으로 알던 바 마침 우리 본국에 가서 십여 년 동안 전도 사업에 종사하시던 미국인 미스 벨 독가란 부인이 쿠바에 전도사명을 띠고 왔다가 우리 한인 교회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와서 우리 일반 동포와 피차 교섭상 경애함과 친절함이 우금 6년 동안에 교회 일에 대하여 서로 의논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주선으로 말미암아 우리 교회의 목사까지 선택하여 이 나라 교회에서 각 처 교회 목사와 여러 장로와 10월 23일 수요일 하오 3시에 집회하여 미국 감독이 목사 장영기 씨에게 안수례를 거행하고 교회 집사 7인까지 선택하였습니다... 모든 형제자매께서 본 교회를 위하여 기도 많이 해주시기를 바라나이다.”
그런데 성경을 가르치는 집사인 양춘명이 장영기 목사가 권하는 대로 강도상 상층으로 올라가 가르쳤는데 터커 선교사가 강도상 상층에는 목사의 좌석인 고로 다음부터는 내려가 강도하라고 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사면청원을 제출하는 등 교회 집사 중 마귀가 있어서 목사를 미혹케 하여 죄를 짓게 한다는 등 자긍 자만의 언사 등으로 교회에서 터커 선교사 이하 여러 교인들이 분개하며 장차 제명할 뜻까지 없지 않았다.
1930년 4월 장영기가 모친의 환갑을 맞아 내외국인을 초대하여 환갑잔치를 베풀고, ‘내가 빈한한 탓으로 연로하신 어머님을 마음과 같이 봉양 못함이 자식된 도리에 일대 유감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 세 형제 중에 아무 두 명은 멀리 묵국(멕시코)에 있으므로 오늘 어머님 환갑연에도 근성을 못 하게 됐기에 모친님께서 그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자신된 나로서 유감천만이올시다. 또한 나의 빙장이 멕시코 경성에 계신데 그의 환갑에 참석지 못함도 우리의 당한 환경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해 6월에 장인환 의사의 추도식이 지방회장 사회로 있었는데 기도순서를 담당했고, 1931년 3월에 지방회 제22주년 기념식에서도 기도했고, 득남의 기쁨이 있었던 그해 7월에 지방회 임원 교체식에서 축사하였다. 한동안 문을 닫았던 민성국어학교 개학식이 있던 1932년 3월에 ‘개학찬성’이라는 제하로 연설했으며, 그해 6월에 민성국어학교 시험식이 있었는데 학생 12명에게 연필을 나누어주어 동포들이 치하했다.
1933년 5월에 장영기와 터커 선교사 간에 불미스런 시비가 발생하여 터커 선교사가 사면하면서 장영기의 신망이 타락되었고, 선교부 연락까지 끊어져서 교회의 곤란은 막심하였다. 이후 장영기는 맛단사스 한인안식교회를 조직하고 전도사와 목사로 활동하다가 은퇴한 후 1956년 6월 13일에 향년 68세로 타계했다. 2017년 한국정부는 그의 독립유공을 기려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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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0.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