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변하는 세상
변화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특히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변화는 큰 긴장감을 유발시킨다. 과거의 추억에 안주하며 평안을 찾으려는 자들은 변화를 거부한다. 그러나 급히 변화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변화란 더 이상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과거 인력을 사용하던 일들을 무인자동으로 대치하고 있다. 은행 일부터 장보는 일까지 삶의 방식이 변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이미 변화에 익숙해져 있다.
크리스천들은 변화하는 세상이 생산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변화가 상식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 어떤 영적의미를 주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변화는 극히 미래지향적이다. 나름 실력을 갖추고 있는 소수가 주도권을 지니고 있다. 대중은 선택권을 상실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저 주류의 흐름을 따라갈 뿐이다.
기독교는 2000년이란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성경은 종말을 포함하여 미래에 대한 진리도 언급하고 있지만 대부분 과거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기록을 중심하기 때문에 과거지향적인 느낌을 준다. 성경에 대한 기본지식이 없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 그리스도와 초대교회를 중심한 사건들 모두 현재 자신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증거와 논리를 중시하는 개인일수록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이 세상은 변화를 추구하고 있는데 기독교와 성경의 진리는 어떤 공헌을 하고 있는지 반문할 것이다.
그러므로 변화하는 세상은 기독교를 향해 이렇게 외치고 있다. (1)거침돌이 되는 과거의 것은 과감하게 버려라! (2)세상을 좋게 변화시킬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라! (3)밝은 미래를 위해 혁명적인 변화라도 수용해라! 비록 신앙을 지닌 성도이지만 변화를 거부하면 결국 도태된다는 위기의식을 지닌 성도들은 어떻게 반응할지 매우 궁금하다.
복음, 다른 복음
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급변하는 세상에 어떻게 접목시킬 수 있을까? 복음은 오직 한 가지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 외에는 없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시어 독생자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복음은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놀라운 소식이다. 기독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성경의 진리를 매우 복잡하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집약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은 오직 한 가지, 즉 십자가 복음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초대교회에 이미 ‘다른 복음’이 등장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갈라디아서 1장 6-7절에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은혜의 십자가복음이 아닌 다른 가르침을 복음이라 생각하여 그대로 믿고 따르는 모습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이 세상에서 완벽한 것을 기대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인간이 만든 것 중에는 영원한 것이 없다. 모두 제한적이고 상대적이다. 그렇기에 주어진 복음이 지닌 가치가 더욱 소중하다. 복음은 죄인을 위해 허락하신 선물이다. 철저한 검사를 걸쳐 완벽한 자들에게만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의 십자가 죽음을 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전적으로 부패한 우리가 한없기 부족하고 연약하며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복음전파는 세상을 향한 축복의 통로를 확장하는 소중한 사역이다. 모든 교회가 관심을 가지고 한 마음으로 동참해야 한다. 복음의 능력을 지니지 않는 교회는 문화센터 또는 친목단체에 불과하다.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지닌 자들에게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자신이 먼저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다. 주어진 은혜의 십자가 복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을 가장 생생하게 전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사건이 바로 자신에게 일어났다는 확신을 보여주는 것이다.
복음 전달 방법의 변화
복음 자체가 귀중한 만큼 복음을 전하는 방법도 소중하게 다뤄져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 자의 마음상태이다. 복음전달방법은 다양할 수 있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자에게 잠시 복음을 전할 때는 오래 사귄 친구를 의도적으로 만나 복음을 전하는 것과 달라야 한다. 직장동료에게 전하는 것과 문화권이 전혀 다는 해외에 사는 자들을 찾아가 전하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그러나 누구에게 어디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도 복음전달자의 마음은 동일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마음에 방법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교회역사는 선교역사라고 해도 전혀 틀리지 않는다. 교회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선교를 통한 복음의 확장을 추적해가는 일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 즉 선교와 전도를 통해 교회 역사가 지속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난 2천년 동안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모두 동일한 복음 전하는 방법을 사용하였을까? 아니다.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의 접근 방법이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복음을 전하는 방법을 달리 선택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 바로 복음 자체에 대한 이해가 근본적으로 달랐다는 것이다. 양쪽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역사적 사건으로 인정하였다.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과 그를 구주로 받아들임으로 영생을 선물로 받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믿었다.
그렇다면 그들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복음전파의 실제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의 역할에 대한 이해가 전혀 달랐다. 한편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복음전파를 위해 하시는 일에, 다른 한편에서는 하나님께서 복음전파를 하는 자들을 위해 하시는 일에 초점을 맞추었다. 전자의 경우는 내가 복음을 전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내 말을 듣는 자에게 역사하시어 성령을 통해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게 하실 것을 믿고 의지하는 태도를 지녔다. 후자의 경우는 내가 복음을 전하는 동한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하는 나에게 성령의 능력을 허락하시어 듣는 자의 마음을 잘 열어주실 것으로 믿고 최선을 다하였다.
또한 전자의 경우 복음을 전달받는 자들은 전적으로 부패하여 자신 스스로 십자가 사건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눈과 마음을 여시어 참된 진리를 깨닫고 수용하게 하신다고 믿었다. 후자의 경우 복음을 전달받는 자들이 지닌 이성과 논리를 통해 제대로 설득하거나 감정적인 요소를 제대로 사용하면 상대가 진리를 수용하기에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이토록 서로 상충되는 방법이 초대교회에서 가장 먼저 시도된 이후 지난 2000년 동안 지속되어왔다. 놀랍게도 현대교회 역시 이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하고 있다. 특히 속도 지향적으로 변화되는 이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적은 노력으로 많은 결과를 얻는 효과적인 방법이 대세이다. 만일 선교지에 어느 정도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면 반드시 이에 상응하는 대단한 성과가 반드시 이뤄질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복음 자체에 대한 이해와 깊은 묵상의 시간을 가져보라. 복음에 대한 이해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복음전달자의 태도와 방법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복음전달방법 2가지 방향...자신이 먼저 복음의 능력 체험해야 전파 가능
변하는 세상에 대한 이해와 불변하는 복음의 진리내용 분명히 파악해야
일그러진 복음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으로 소개한다. 성경이 그렇게 약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성경이 가르치는 복은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물질이나 자녀 또는 건강의 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믿는 자에게 이 땅에서 성공하도록 보장하는 분이 아니다. 산상수훈에 잘 드러나 있듯 성경적인 복은 영적이며 내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과 있게 복음을 전달한다는 명목으로 세상적인 복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의 요구에 맞추어 결국 일그러진 복음을 소개하는 경우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널리 알려진 기복신앙과 번영신앙이다. 절대자를 의지하려는 종교성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자기희생을 요구하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참된 신앙이란 사실 앞에 크게 실망할 수 있다. 언제든지 자신의 기준과 기대와 다르면 실망하고 교회를 떠날 수도 있다. 일그러진 복음은 죄인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도구가 될 수 없다.
교회가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복음전파의 사명을 제대로 하려면 반드시 변해야 한다. 불필요한 교회의 전통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 이 시대의 문화를 분명하게 읽어낼 수 있는 눈을 지녀야 한다. 예배의 형식부터 교회당의 구조까지 현대인들의 눈높이를 의식하여 이질감을 없애는 것이 좋다. 복음이 삶의 상황과 현실에 다가서고 영향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복음 전파
복음을 제대로 전하려면 무엇보다 복음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한다. 혹시 다른 복음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는지 또는 인간중심으로 복음을 이해하고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은 오직 하나이다. 이미 복음에 대해 여러 차례 성경공부를 했고 매주 설교를 통해 확인받기에 매우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복음의 내용은 매우 깊다. 복음이 우리 삶과 교회를 포함하여 이 세상 모든 것이 절대적인 영향은 끼치기 때문이다. 주어진 십자가 복음은 우리가 처한 형편에 따라 매우 다른 방법과 모습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특정상황에서 복음을 변형시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가치를 드러내며 소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변하는 세상에 대한 이해와 함께 불변하는 심오한 복음의 진리의 내용을 분명하게 파악하여야 한다.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은 자는 그 누구보다 이 사명을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이 이해하는 한도 내에서만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역사를 통해 한 사람의 변화를 통해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신 일들을 자주 접할 수 있다.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변화된 사람이 사회와 가정을 변화시킨다.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지닌 자들이 한 사람의 영혼을 귀하게 여겨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자신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람들과 교회를 세우실 것을 확신하며 최선을 다해야 한다.
복음을 가장 분명하게 전하는 방법은 친히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다. 변화된 자신의 삶이 복음을 전하는 근거가 되어야 한다. 복음의 능력은 결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자기중심의 삶을 살던 자가 회개하고 주님을 구주로 모시고 기쁘게 그 분의 말씀대로 사는 자로 변화하는 것이다. 이런 경험이 없이 교회생활에 익숙해질 수도 있다. 직분을 받아 칭찬받는 봉사자가 될 수도 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전도와 선교에 열심을 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복음의 능력에 대한 경험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은 종교적 행위에 불과하다. 복음전도의 열매는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교회에 정착하는 것 이상이다. 복음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 세상은 더욱 급변할 것이다. 그럴수록 영원히 불변하는 십자가 복음에 뿌리를 내린 신앙인으로 굳건히 서야 한다.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새 생명을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놀라운 변화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다. 복음을 전하는 사명은 즐겁고 복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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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0.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