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춘택은 한국에서 기독교 신앙을 받은 교인이었다. 4년간의 노동 계약기간 높은 보수와 다양한 편의를 제공한다는 허위 광고에 돈을 벌어 금의환향하겠다는 꿈에 부풀려 멕시코의 남부 살리나크루스 항구로 떠나는 영국 소속 ‘일포드’ 화물선에 탄 천여 명과 함께 1905년 4월 4일에 승선하여 다음달 5월 15일에 멕시코에 도착하여 초초란 농장에 소속되었다.
초초란 농장 전도자
한국에서 기독교 신앙을 가졌던 최춘택은 한국 평양에서 기독교 신자였던 김제선을 영적으로 깨웠다. 김제선이 상항에서 출간되던 ‘대도’에 기고한 글에서 당시 자신의 믿음 상태를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하였는데 이 글에서 최춘택의 전도자로서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옵시와 그 법을 범하고 죽을 죄인들을 한번 불쌍히 여기사 1909년 전에 그리스도를 세상에 탄생시키시와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으면 영생하고 믿지 않는 자는 벌하신다 하셨고, 말씀 중 구하는 자에게 주며 찾는 이가 만나며 두드리는 이에게 열어주신다 하셨기에 내가 십여 년 전에 그 말씀을 들었는지라. 연이나 잘못 생각하고 돈도 구하며 권세도 구하며 명예도 구하다가 그것 저것 하나도 성취치 못한 고로 하여 곡절을 알지 못하여 두루 방황하다가 세상이 눈에 가리우고 하나님 원수 마귀가 나를 꾀이는 고로 이 세상 불법함을 많이 행하였으니 나중 영혼은 다시 말할 것 없거니와 육신도 망하게 된지라. 어름어름 세월을 보내다가 1905년에 이민으로 멕시코 국에 와서 생전 보지 못한 일을 시키는 고로 우리 동포가 다 일시도 평안함은 없고 날로 고생과 두루 방황하여 그 정형을 나도 당하였지만 차마 볼 수 없는지라. 내가 한인의 고생을 다 말하려면 책 몇 권이 될는지 그런고로 그만 두오마는 그런 중 감사함을 얻은 것은 하나님이 참 불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사 1907년부터 은혜를 한인에게 주심으로 이 같은 죄인을 벌하시지 않으시고 성신이 내 마음을 찔러 모든 죄가 들어나는지라.”
최춘택은 김제선과 다른 형제 2명과 함께 하루에 두, 세 시간만 눈을 붙이고, 밤잠을 자지 않고 밤중에 다른 농장으로 가서 밤이 새도록 전도하다가 새벽이 되면 자기 농장으로 돌아와서 새벽 4시 반에 십장의 점고에 참석하였다. 이런 가운데 2, 30여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최춘택이 김제선을 영적으로 각성시켜 전도하던 그해 1906년 8월에 초초란 농장에서 12, 13세 된 두 어린 소년이었던 박이성과 이삼봉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매를 맞으면서도 믿음을 지킨 사건을 계기로 신앙의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방화중이 들려주는 이들 어린이에 관한 글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다.
“형제들이여, 이 두 어린 동생의 믿음을 본받을지어다. 박이성, 이삼봉이는 연기가 불과 12-3세 된 아이들이다. 이상에 말한 초초란 농장에 고용되더니, 한 날은 그곳 교우들이 주일 지키기 위하여 농장 서사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하나님을 공경하여야 하겠으니 일을 아니 하겠다 함에, 서사가 대노하여 즉시 장성한 어른들을 다 잡아 가두고 이 두 어린아이를 불러서 말하기를 너희들도 주일을 지키고 일을 아니 하겠느냐, 만일 일을 아니하겠다면 맞으리라 함은 서사 마음에 생각하기를 어린 마음에 매를 무서워하여 주일을 아니 지키겠다할까 함이라. 장하다 저 두 아이의 믿음이여, 능히 그곳 30여 명 동포로 하여금 주일을 평안히 지키게 하였도다. 저희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는 매 맞아 죽을지언정 주일을 지키지 아니할 수 없다 함에 서사가 더욱이 노하여 하인으로 하여금 두 아이를 땅에 엎어놓고 무수 난타함에 유혈이 낭자하더라. 그러나 마침내 불복함에 서사가 할 수 없이 두 아이와 20여 명 동포를 다 놓아주며 말하기를 이후부터는 마음대로 주일을 잘 지키라 하였더라.”
이렇게 꾸준히 몇 달 동안 전도하여 ‘김윤원, 이근영, 김성민 등 초초 농장에 있는 동포는 거의 다 믿었고, 다른 농장에서도 믿는 이가 생겨나 교인이 17, 8명에 이르렀다. 죄를 자복하며 하나님의 큰 권능을 믿고 일일 간구하는 중에 차차 믿는 형제가 수십여 명에 달하였는데’ 이는 최춘택으로부터라고 보면 된다. 곧 최춘택이 신앙운동의 출발점에 있었다.
1908년에는 믿는 형제가 백 명에 달했다. ‘각처 믿는 형제가 일심 감사함으로 세상에 괴로움을 생각지 않고 영생복락과 한인이 회개하고 친목만 구하였는데 1909년에는 믿는 자가 3백 명 가량이나 되고 마음이 날로 즐거워 집집마다 기도 찬미소리가 내왕하는 사람의 마음을 놀라게 했고,’ 가난하였으나 믿는 형제들이 장차 예배 볼 집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초초란에 거주하는 동포 중에서 1909년 2월에 20여명이 모여 그 자리에서 그들이 예배당 마련을 위해 헌금한 액수가 6, 7백 원이 되었다. 이에 대도는 “하나님께서 원방에 외로이 있는 한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만사의 근본 되는 믿음을 먼저 주셨으니 찬미하기를 말지 아니하겠으며, 또 그와 같이 인도자도 없는 동포들이 그와 같이 하나님 일에 열심하니 또한 감사하기를 쉬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더 많이 나리기를라”라고 적었다.
상항에서 발간하던 대도 1909년 5월호에 최춘택이 기고한 다음의 ‘공부자언조문도석사가의’라는 제하의 글에서 그의 전도자 됨을 엿보게 된다.
“대저 세상에 소경이라 하는 것은 눈이 상하여 보지 못하는 소경도 있고, 눈이 성하고도 보지 못하는 소경도 있거니와 우리 한인동포는 소경이 많은 고로 그 소경된 원인을 대강 설명하오니 천박한 식견을 일개 웃음거리로 알고 한번 보시기를 바라노이다. 대개 세계라 하는 것은 그 근본을 말하자하면 한분 천주가 계셔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하늘과 해와 달과 별이 있게 하시고 그와 같이 세계를 분하여 동서남북에 위치를 정하시고 또 사람을 지으사 육체에 사지를 마련하시고 그와 같이 사시 절기를 마련하사 인류에 적당케 하여 하나이라도 부족함이 없게 하셨거늘 우리 한인 동포는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자행자지하여 다 자기가 잘 난 줄로만 생각하니 어찌 몽매하고 우준한 생각이 이렇듯 하뇨. 해서 각국을 돌아 보건데 예수교로 종교를 삼고 봉숭하는 나라마다 묻지 말고 부강하며 그 종교를 숭봉치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국민은 물을 것 없이 쇠약하여 지는지라. 그 사실은 지혜 있는 자에게 물을 것 없이 분명히 알바인 즉 모단 완고의 마음은 흩어버리고 성경복음의 거룩한 말씀을 깨달을지어다. 슬프다, 동포여, 하나님을 믿으면 영생만 얻을 뿐 아니라 자기 나라도 보존할지라. 불가불 우리 구주 예수를 독실이 믿어 합심 단체가 되면 세상에 어려운 일이 어디 있으며 두려운 것이 어디 있으리오. 그런즉 남에게 의뢰지심을 내여 버리고 자주 독립을 힘쓸 것이라. 폐일언하고 하나님의 풍부한 성질대로 진리의 말씀을 궁구하여 천지 만물에 그 원인을 깊이 생각하여 만물지중에 유인이 최귀라 하는 말을 실지로 표명할 바라. 고린도전서 14장 20절에 말씀하기를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고 지혜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하였도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교회는 세계를 문명케 하는 큰 근본이라. 우리 동포들은 어두운 눈을 밝히 씻고, 복음의 참 이치와 구법에 큰 도리를 깨달아 어서 속히 우리 주께로 돌아와 맹인을 면하고 개명 진보에 새 사람이 되어 공부자가 아침에 도를 듣고 전역에 죽어도 가하다 한 것을 다시 생각하기를 간절히 바라노라.”
예배당까지 마련한 교인들은 1909년 8월에 교회 직원을 선출했다. 교사에 김제선, 집사에 김윤원, 김성민 그리고 이근영이었다. 김윤원은 황해도 양반으로 고종의 황실 친위대의 고위인사였고, 이근영은 광무군 출신이었다. 이날 남자 21명, 여자 7명, 어린이 8명이 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교회 직원 명단에서 최춘택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이후에도 최춘택의 이름이 교회와 관련하여 나오지 않으므로 여기까지 복음운동을 이끈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의 복음 사역은 2년 미만이 된다.
국민회
이후 최춘택은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복음운동을 멈추고, 국민회에서 복음으로 문화운동에 뛰어들었다. 1909년 11월 18일에 국민회 메리다 지방회관에서 일동 회원이 모여 그날 하오 6시에 하나님께 예배하고 지성으로 기도한 후 7시에 회장 이근영이 임시회를 열고 무예 운동에 관해서 나눌 때 쏘실 경찰이었던 최춘택은 ‘지나간 일을 우리 조상에게만 원망하여도 쓸 데 없고 미래에 일어나는 일은 우리의 자손에게만 담책할 수 없으니 금일에 국권 회복은 각각 우리의 책임이라 쉬지 말고 힘쓰자’고 연설했다.
평양에서 전도한 김제선과 교회 설립하고 2년간 복음사역
교회 복음운동 멈추고 국민회에서 복음으로 문화운동 참여
이날 북미총회 파송위원 황사용이 등단하여 ‘하수를 기우리는 듯 도도한 수만의 말이 골절을 자격하며 혈관을 뜨겁게 하였고, 5조의 특약을 당한 진경과 장래 신한국이 세계상에 활동할 방침을 역역하게 지시하매 앉은 자들이 혹 상쾌무도하며 혹 비감락루하여 밤이 깊음을 깨닫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날 숭무 학교를 설립하고 그 임원을 선정하였는데 도지휘관에 이근영, 조교에 양귀선, 조병하, 이수근이었고, 이들은 광무군 출신이었다.
1910년 6월에 메리다 지방회는 숭무학교를 보고했다. 10여명이 등록하였음을 보고한 그날 김명순, 이종오, 이순근, 이환응, 김광윤, 김익주, 송학성, 권학도, 서원식, 김성민, 김성택, 최영진과 함께 최춘택도 1원을 기부했다. 이외에 임상준은 ‘학도의 복장 60벌을 일삭 동안에 불철주야하고 자기 손으로 재봉하여 숭무학교에 기부하였는데 수고비를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니 의기 있는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1912년 5월에 와히깨나 농장에서 개교한 일신학교에 이어 진성학교가 1916년 11월 16일에 메리다 잇십깝 농장에서 개교했다. 이듬해 4월에 호근덕, 한종원, 유필준, 강순천, 유무봉, 서용성, 김대흥, 최인출, 김복학, 김두홍, 김대만, 박춘봉, 강운학, 김기룡 등 14명이 유카탄 진성학교에 등록했다는 보도와 함께 기부금 명단이 신한민보에 게재되었다. 오경천, 노형달, 김치일이 1차로 기부했고, 김흥기, 최영진, 조길만, 변윤행과 함께 최춘택은 매삭 기부하기로 하였는데 최춘택은 매삭 1원을 기부하기로 했다.
그해 5월 6일에 메리다 지방회의 일진갑 지방 경찰이었던 최춘택이 사임하였으므로 강흥석이 보임되었다. 이외에 녹각 지방회 임원으로 경찰 차용환이 사임하고 이희택을 선정하였고, 대의원 배기화가 사임하여 강명원이 선임되었고, 사찰 박희로가 사임하여 윤재봉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의무금을 납입하는 회원에게 구 증서를 걷고 새로운 영문증서를 발급하기로 했고, 의무금 납입일자는 다음 통상회일로 했으며, 회관이 좁고 식수가 불결하여 적당한 가옥을 찾기로 하였다. 그날 재정보고에서 4월 잔금 135원67전에 5월 동맹금 193원을 합하여 수입이 328원67전이었고, 지출금 183원68전을 제하니 5월 잔금은 144원89전이었다.
그해 11월 1일에 국민 의무금 납입자 명단이 신한민보에 발표되었고, 50여 명과 함께 최춘택은 2원50전을 냈다. 다음달 18일 보고에 따르면 메리다 지방회 일진갑 경찰원으로 최춘택이 재선되었다.
1918년 11월 3일에 모인 메리다 지방회는 초촐라 지방 경찰소 서기로 최춘택이 선출되었고, 본 지방 경찰원에 허영보, 법무원에 여춘근, 사찰에 김한진을 선출했으며, 산나닷 지방의 경찰원 이우식이 사임하여 배기화가, 서기 김덕순의 사임에 박 일이 보임되었다. 그리고 의무금 불납자에게 권리를 허락 않기로 했고, 재정 조사 위원 투표를 조사하기로 하였으며, 노동 증명서법을 위반하는 경우 이를 조사하여 노동 주무원과 범규한 노동자에게 벌금 5원을 징수하기로 했다. 이날 재정 결산은 수입부에 10월 통상회 잔금 455원38전, 당삭 월연금 598원, 의무금(십일조) 70원50전, 권학비(총회하사금) 15원, 벌금 50원이어서 총 1,188월 88전이었다. 지출부에 준비와 적립과 기혼에 160원, 각종 용하금에 291원30전이어서 총 451원30전이었다. 11월 총 잔금은 737원58전이었다.
1919년 1월 9일 신한민보에 게재된 멕시코에서 국민의무금 2원50전을 납부한 30여명의 명단에 최춘택이 있다. 이날 최춘택의 이름이 공개된 이후 한인사회에서 그의 이름은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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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6.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