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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新)유행, 교리적 그리스도인

- 한결같음, 구원, 교회

한결같은 신앙과 삶

 

성경을 보면 신기한 것이 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성숙하고 완전해야 하는데 사람이란 존재가 조금만 잘된다 싶으면 반드시 타락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 정도 은혜를 받았고, 그 정도 축복을 받았으면,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갈 만도 한데, 시간이 흐를수록 예외 없이 교만하고, 타락하고, 냄새나는 사람이 되더라는 것이다. 세상의 일은 10년 정도만 어떤 분야에 최선을 다하여도, 누가 뭐라고 해도 잘 흔들리지 않을 사상과 자세를 가지게 되는 데, 신앙의 영적세계만큼은 그렇지 못하더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타락한 성경의 인물이 어디 있는가? 가룟 유다도 사울왕도 모두가 처음에는 열정을 품고 주를 좇던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이단이 처음부터 어디 있었겠는가? 목사 안수 받고 성령이 충만하여 목회를 할 때는 그 사람이 이단이 될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찢으며, 기도의 무릎을 풀지 않고 예배하던 사람이 교회를 대적하고, 목사를 욕하고, 자기가 마시던 우물에 침을 뱉고 돌아서는 그런 일을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이에 대한 성경의 답은 매우 단일 명확하다. 인간의 본질이 가지는 죄성이 그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자연 상태의 모습 속에 자신을 방치하면, 아무리 좋은 신앙의 인물이라고 할지라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라도 죄성을 가진 존재로서, 깨어 기도하고 의식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구하지 않으면 결국 말하는 것이나 행하는 모든 것이 불신자 보다 더 못한 삶을 살게 되더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한결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혹여, 우리의 삶에 육신의 치매와 같은 어려움의 병이 찾아오고 생의 마지막 호흡이 거칠어지는 때가 찾아 온다하여도 결코 예수를 부인하지 않으며 일평생 한결 같이 주의 교회를 출입하며, 어떤 인생의 환란과 고난 앞에서도 주님 앞에 행하는 모습, 그것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복 있는 존귀한 인생의 모습인 것이다. 

 

교만-예배의 실패

 

죄성을 가진 인생이 한결같은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죄성은 항상 호시탐탐 죄 지을 기회를 찾으며, 교만으로 그 정체를 드러낸다. 교만이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무엇인가? 예배를 시시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예배를 소홀히 여김으로, 자신의 영적감각을 회복할 기회를 상실한 채 교만의 결론인 패망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그렇게 은혜를 경험했으면 한결같은 모습으로 평생을 살아도 그 은혜를 갚을 수 없을 것 같은데 인생의 교만한 죄성은 예배를 통해 은혜를 회복할 기회를 놓침으로 결국 안타까운 모습으로 삶을 결론짓게 되는 것이다.  

역대하 26장에 보면 웃시야 왕이 등장한다. 그는 아버지 아마샤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16세에 졸지에 왕위에 오른다. 그렇게 시작된 통치가 52년간 이어진다.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기간이 아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최선을 다하는 삶의 자세가 어우러진 결과였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많은 일을 했다. 참 좋아 보이는 왕으로서의 결과물을 낳는 삶을 살았다. 국방을 튼튼히 하고, 광야를 옥토로 개간하며, 농산물도 풍부하도록 백성들을 잘 이끄는 좋은 왕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결같지를 못하였다. 교만함으로 자기위치, 자신의 예배의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교만의 특징인 예배의 실패를 가져온 것이다. 제사장이 할 분향을 자신이 하려하다가 하나님이 치심으로 문둥병이 발하여 남은 평생을 별궁에서 고통 중에 죽는 안타까운 인생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버지 아마샤의 갑작스런 죽음의 이유가 에돔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패전국의 우상을 가져왔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스스로 죽을 짓을 한 것이다. 결국, 하나님이 치심으로 갑자기 죽게 되었다고 할 때, 분명히 그것이 교훈이 되었을 법한데, 실제로 웃시야왕이 그렇게 살았음을 성경은 가르쳐 준다. 역대하 26장 5절에 그의 형통함의 이유를 밝혀주는 대목이 선명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 한마디로 스가랴 선지자가 살아서 그의 귓가에 말씀을 들려주었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였을 때 웃시야 그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형통의 삶을 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지금 이 시대에도 동일하신 하나님은 동일한 은혜를 말씀을 통해 들려주신다. 그리고 그 말씀이 귓가에 들려지고, 이를 달게 순종하는 자에게는 동일한 형통의 은혜를 허락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오늘날은 어디  가서 그 말씀을 달게 들을 수 있을까? 오늘날로 말하면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주의 종에게서 살아있는 말씀을 듣게 될 때, 그는 한결 같이 살아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잘되고 형통하여도 예배가 실패하고 교회생활이 온전치 못하면 그의 귓가에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말씀이 들려지지 못할 때 결국 그는 자기 목숨하나도 온전히 보존하지 못함을 깨닫는 안타까운 탄식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교리적 그리스도인

 

오늘날 코로나 시기를 지나면서 많은 부분에서 우리 신앙의 한결같음을 장애하는 일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교리적 그리스도인의 등장이다. 자신의 잘못된 신앙행태를 변증하고자, 교리를 임의대로 해석하여 자기 소견을 정당화시키는 경우이다. 연원적으로 교리적 그리스도인의 원조를 찾아본다면 아마도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일 것이다. 머리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있었지만, 참되게 그 하나님의 뜻을 알고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다. 혹자는 질문한다. 이들이 그래도 천국은 갔겠죠? 그 질문에 답을 회피하게 된다. 구원의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문제이기에 말할 수 없기도 하지만 실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교리 안에서도 의문시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리에 대한 지식만을 가지고서, 자신의 구원을 말하는 어리석은 이들이 많아졌다. 코로나 시기에 교회를 가지 않고서 영상예배의 편리함에 젖어본 이들이, 자신의 소견에 대한 합리적이 이유를 찾고자 하는 말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이미 교회를 갈수 있고 성전의 예배를 드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나는 예수를 주로 고백한 적이 있으니 구원은 받은 것이고, 이 정도 농땡이(?)는 구원의 문제와 전혀 상관없는 것이라고 쉽게 말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몸인 교회를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셨음에도 노아의 방주와 같은 교회를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그래도 구원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교리가 그렇다고 당당히 변증한다. 

그러나 노아의 방주가 없으면 몰라도 이미 방주를 예비하여 두고 그것이 지천에 널려 있도록 교회 시대를 열어 주셨다면 이런 시대에 교회를 떠나서 무교회주의자와 같이 교리적인 구원만을 논한다면 그보다 더 어리석은 신앙이 어디에 있겠는가? 새로운 차원의 영적교만이라고 할 수 있다.   

 

구원의 즉각성, 점진성

 

구원은 예수님의 이름을 영접하며 즉각적인 회심을 통해 성령의 인침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구원은 그 즉각성 만큼이나 점진성이 중요하다. 단회적인 즉각적 구원의 은혜를 강조하면서 삶의 성화와 성숙한 섬김으로서의 신앙을 무시해서는 결코 복 있는 은혜를 누리는 성도라고 하기 어렵다. 잉태된 어린 아기가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그저 잘 받아 누리면 된다. 가급적 많이 움직이지 않을수록 좋다. 엄마의 탯줄로부터 모든 영양분을 공급받으며 양수 속에 가만히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그러나 그 아기가 세상에 나오게 되면 그때부터는 스스로 엄마 젖을 빨아야 살게 된다. 만약 태어난 아기가 젖을 먹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있으면, 병이 들었던지 아니면 뭔가 큰 문제가 생긴 것이다. 건강한 아이는 스스로 움직이며 젖도 먹고 부모에 말씀에 순종하며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다. 

구원도 마찬가지다. 구원은 단회적으로 일어나지만, 그 구원은 점차 자라가야 하는 것이다. 영혼의 양식인 말씀을 먹고, 영혼의 호흡인 기도에 힘쓰며, 영혼의 운동인 전도에 열심내고, 영혼의 회복인 예배에 초점 맞추어 열심히 주의 전으로 나아와 성숙한 신앙인으로 자라야 한다. 그래서 참된 성도, 참된 하나님의 자녀 된 그리스도인은 주일, 예배가 있는 날이면 저 성전 문을 열고 기쁨으로 나아오는 것이다. 이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성도의 모습이다. 

 

교회로 나아오세요

 

그런데 오늘날 교리적 그리스도인들은 말한다. “왜 꼭 교회로 나아와야 된다고 하느냐? 교리적으로만 보면, 일평생 교회에 딱 한번 나온다 해도 구원받는 것 아니냐!” 자신의 작은 신앙의 지식으로 교회를 세우시고 예배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큰 은혜를 정면으로 대적하는 어리석음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마치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가 생명이 있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영적인 병이 든 것이다. 하나님은 정한 시간에 정한 장소에서 산 제물(Living Sacrifice)로 자신의 몸을 드려 찬송과 기도와 예배를 드리는 그런 자녀를 보기 원하시는데, 이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게다가 취사선택된 교리로 이를 합리화시키는 것이다. 교회와 예배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모독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교회는 어떤 곳인가?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다. 병들고 잠든 영혼이 회복되어 하늘 문을 열고 부어주시는 은혜의 빗줄기가 쏟아지는 곳이 교회이다. 거친 사막 광야 같은 세상을 이겨내는 하늘의 신령한 에너지를 공급받는 은혜의 원천이 교회이다. 그 교회로 나아오라! 주께서 만나주시고 세상 앞에 당당하고 담대하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으며, 한결같은 은혜로 승리하는 복을 허락해 주실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10.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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