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은혜
”은혜를 사모한다. 은혜가 충만하다. 은혜를 받았다. 은혜 안에 거한다. 은혜 생활을 한다. 은혜를 나눈다.“ 은혜는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주 접하는 단어다. 큰 은혜, 폭포수와 같은 은혜, 감동스런 은혜, 한없는 은혜, 값진 은혜 등과 같이 어떤 수식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표현되기도 한다.
어느 정도 신앙생활 경험이 있는 성도들은 매우 친근한 단어인 은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도무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시는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선물이란 것이다. 믿음이 대단하거나 남다를 열정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셔서 무상으로 은혜를 공급받는다는 의미이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성도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가에도 은혜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국 교회 성도들은 얼마 전부터 ‘하나님의 은혜’라는 제목의 복음성가가 열창하며, 지으신 것부터 시작하여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선언한 바울의 신앙고백에 동참하고 있다. 은혜와 연관된 성경 말씀을 접하거나 찬양을 부를 때에 실로 마음에 큰 감동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은혜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성도가 얼마나 될까? 은혜란 하나님께서 거저주시는 것이란 것 정도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더군다나 사용하지 않아야 할 때에도 문맥과 상관없이 오용되고 있기에 더욱 혼동이 야기된 듯하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특정한 오류를 드러내지 말고 용납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은혜로 모든 것을 덮는다거나 은혜로 그냥 지나간다고 표현할 때이다. 여기서 은혜가 무엇인지 의미하는지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지만 실상 각자 전혀 다른 이해를 하고 있을 것임에 분명하다. 또한 이런 식의 표현이 성경적으로 올바른 것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는 듯하다.
예배를 통해
은혜는 예배와 연관되어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는 듯하다. 하나님께서 예배에 임하는 성도들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임한다. 예배당 안내위원을 맡거나, 회중을 대표하여 기도를 하거나, 특별 찬양을 맡은 자은 자신들의 섬김으로 더욱 은혜로운 예배가 될 수 있도록 기도로 준비한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로 설교시간은 성도들이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예배의 중심시간이다. 성례와 함께 은혜의 방편이라 정의하여온 것이다. 아무쪼록 예배는 은혜 일색이다. 교회지도자들은 성도들이 예배를 통해 은혜를 체험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그럼에도 일부 성도들 중에 예배를 통해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고 마음의 불편을 경험하는 시간으로 전락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은혜를 사모한다고 하지만 실상 제3자의 입장에 서서 은혜 여부를 평가하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 참석한 교회의 예배에 은혜가 없었다. 찬양대원들 목소리가 뒤죽박죽 별 은혜가 없었다. 준비가 덜 되었는지 오늘 목사님 설교에 은혜가 없었다. 악기연주 소리가 지나치게 커서 찬양시간에 전혀 은혜 되지 않았다.”
만일 독자 중에 이런 생각을 했었거나 말한 적이 있다면 특정 예배행위와 자신의 관점에서 은혜를 연결시켜 평가하려는 시도였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만일 이런 경험이 있었다면 혹시 자신이 진정 예배를 사모하였고 은혜 체험을 위해 마음을 준비하였는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함께 참석한 성도들은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데, 자신은 타인의 경험에 동참하지 못하였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냉철하게 고민해보아야 한다. 특히 은혜란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선물로 주시는 것이라는 기본적인 인식을 지니고 있다면 누구든지 주관적으로 은혜의 여부를 판단하는 행위는 곧 하나님의 고유사역에 대한 평가를 시도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물론 예배순서를 맡은 자들이 준비가 부족하거나 어설퍼서 예배에 임하는 성도들에게 누를 끼치는 경우도 있다. 대중기도의 내용이 물의를 일으킬만한 엉뚱한 내용이거나 찬양대가 괴로울 정도로 불협화음을 내거나 설교자가 게으르거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만을 나누려한다면 크게 잘못된 것이다. 예배순서를 맡은 자나 참석하는 모든 자들은,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부르심 앞으로 나아간다는 낮은 자세와 주어진 사명을 어떻게 다 할 것인지 살피고 반성하고 필요에 따라 반드시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예배와 연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은혜’ 인간적 가치로 표현 말아야
가장 분명한 ‘은혜’ 경험은 자신이 추한 죄인임을 분명히 인식할 때
은혜란?
예배를 마치고 설교자와 인사를 할 때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은혜를 받았다?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혹시 설교내용에 동의한다는 뜻일까? 대단히 감동적이었다는 표현일까? 은혜를 특별한 느낌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은혜를 체험하면 ‘감동’을 받게 되지만, 마음이 움직이는 감정의 변화 자체가 은혜는 아니다. 은혜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분명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의 선물을 인간의 판단 대상으로 전락시킬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은혜가 된다, 생긴다. 사라진다... 등의 표현에 익숙해져 있다면 은혜를 인간적 가치로 표현하는 것도 중단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은혜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은혜는 성경용어이다. 구약이 율법에 관한 것이라면 신약은 은혜에 관한 것이라고 성경을 대조적으로 이해하려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 기록된 책이다. 그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있다. 성도들이 은혜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려면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올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는가? 죄인에게 구원을 베푸시기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신 것이다. 그는 불순종한 아담의 범죄이후 전적으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셨다. 구약에 여러 언약들이 등장한다. 이는 모두 향후 오실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알려주시기 위해 주신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 속에서 진행되었고 그가 정하신 시간에 이뤄진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십자가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을 통한 구원은 인간범주 밖에서 이뤄진 일이기 때문이다. 죄로 인해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아무리 노력하고 수고하여도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는 무능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은혜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고 표현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
십자가를 묵상할 때 주로 무엇에 집중하고 있는가? 매를 맞고 찢기신 그리스도께서 운명하시기까지 얼마나 아프셨을까 생각하면 울컥해지는 경험할 수도 있다. “The Passion of the Christ”와 같이 생생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장면을 중심으로 제작된 영화를 관람하는 성도들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성도들의 십자가 묵상이 단순한 감정에 머물러 있기보다, 한 걸음 나아가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어떤 일을 이루셨기에 하나님께서 죄인의 구원을 허락하셨는지 구체적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아담의 후손은 모두 하나님이 내리시는 죽음의 형벌을 피할 길이 없었다. 이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의를 상실하였던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통해 완전한 순종을 이루셨다. 이로서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 선언하신다. 부패한 인간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 부패성이 사라지고 거룩한 사람으로 변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신앙생활을 해도 인간의 부패성은 그대로 남아있지만 그리스도께서 의를 근거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것이다. 십자가는 죄인을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형용할 수 없이 크고 놀라운 것인지 우리에게 잘 알려주고 있다.
언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가장 분명하게 경험할 수 있을까? 자신이 얼마나 추한 죄인인지 분명히 인식할 때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자임을 깨달을 때이다. 그리스도의 피로서 죄책을 씻어주셨지만 언제든지 악한 생각과 행동이 가능한 부패한 인간이란 사실을 겸손하게 인정할 때이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중세로마가톨릭교회를 대항하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성경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구원의 은혜는 인간의 범주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가르치고 있지만 중세교회는 고행과 면죄부 등 인간의 노력으로도 가능하다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독자 대부분이 잘 알고 있는 내용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인간 스스로 얻어낼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되었을까? 인간의 전적부패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직 은혜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은혜’ 사상을 가르쳤다. 은혜는 한 성도의 판단기준 또는 감성에 의해 좌우될 성격이 아니다. 혹시 분명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경험이 있으나 현재 영적으로 무뎌있다고 한다면 즉시 회개하고 하나님께 엎드려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청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이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았다는 확신 이상이다. 구원받은 자로 살아간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자를 변함없이 끝까지 붙들고 가신다. 간혹 우리의 판단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지 않으신다고 단정할 때가 있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때로는 고난과 역경 자체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분명하게 알게 하신다. 그러므로 이미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을 지닌 성도는, 하나님께서 숨 쉬는 순간마다 범사에 은혜를 베푸시는 분임을 삶을 통해 체험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가 어떤 상황에 처하여 있든지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주시길 원하시는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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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1.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