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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김제선(1882-1943)

김제선은 1882년경에 황해도 재령군에서 태어났다. 평양에 거주하던 때 그는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이었다. 

4년간의 노동 계약기간 높은 보수와 다양한 편의를 제공한다는 광고에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1905년 4월 4일에 멕시코의 남부 살리나크루스 항구로 떠나는 영국 소속 ‘일포드’ 화물선에는, 일본 외무성 통상국 1차 자료 한인 초기 농장보고서에 따르면, 1,085명이 승선하였다. 이들은 고종황제의 친위대 소속 간부부터 평범한 농사꾼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는데 이 선박에 김제선과 그의 부인 그리고 그의 어머니 등 가족이 있었다. 

그해 5월 8일에 멕시코에 도착한 한인 노동 이민자들은 11개 에네켄 대농장주에게로 흩어졌고, 김제선은 메리다 시내에서 매우 가까운 곳의 초초란 농장에 들어갔다. 그는 살인적인 더위에 노예처럼 혹사를 당하면서도 충직한 노동자였다. 

 

메리다 한인감리교회 교사

 

멕시코에 온 지 반년이 되던 1905년의 11월 17일에 한국이 을사보호조약으로 일본의 보호령이 되면서 김제선은 다른 한국 노동이민자와 마찬가지로 ‘국제미아’신세가 되었다. 이런 가운데 평양에서는 기독교인이었으나 멕시코에서는 김제선이 ‘농장 일에만 골몰한 나머지 농주의 학대가 심함으로 믿음을 배양치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전 믿음을 잃고 졸고 있었다.’ 같은 농장에서 일하던 동료 노동자였던 최춘택이 원래 기독교인이었는데 김제선의 믿음을 깨웠다. 그때가 1906년 8월이었으니 김제선은 1년4개월간 졸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한인들의 일하는 형편을 말하면 전연히 속박을 당하여 주거동작의 자유를 얻지 못하는데, 주일을 임의로 지킬 수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전도코자 하되 임의로 다른 농장에 다니지 못하더라. 아침에 조금만 늦게 일어나면 잡아다 때리고 허락 없이 동포를 만나보았다고 가두고 핍박”하기가 다반사였다. 

특히 처음에 초초란 농장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주일을 마음대로 지키기까지 고난이 있었다. 어른들은 창고에 갇히고 어린이들은 매를 맞았다. 특히 박이성과 이삼봉 등 두 어린이의 용감한 믿음과 자세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방화중이 들려주는 이들 어린이에 관한 글을 읽도록 한다. 

 

“형제들이여, 이 두 어린 동생의 믿음을 본받을지어다. 박이성, 이삼봉이는 연기가 불과 12-3세된 아이들이다. 이상에 말한 초초란 농장에 고용되더니, 한 날은 그곳 교우들이 주일 지키기 위하여 농장 서사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하나님을 경경하여야 되겠으니 일을 아니하겠다함에, 서사가 대노하여 즉시 장성한 어른들을 다 잡아 가두고 이 두 어린아이를 불러서 말하기를 너희들도 주일을 지키고 일을 아니하겠느냐, 만일 일을 아니하겠다면 맞으리라 함은 서사 마음에 생각하기를 어린 마음에 매를 무서워하여 주일을 아니 지키겠다 할까 함이라. 

장하다 저 두 아이의 믿음이여, 능히 그곳 30여 명 동포로 하여금 주일을 평안히 지키게 하였도다. 저희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는 매맞아 죽을지언정 주일을 지키지 아니할 수 없다 함에 서사가 더욱이 노하여 하인으로 하여금 두 아이를 땅에 엎어놓고 무수 난타함에 유혈이 낭자하더라 그러나 마침내 불복함에 서사가 할 수 없이 두 아이와 20여 명 동포를 다 놓아주며 말하기를 이후부터는 마음대로 주일을 잘 지키라 하였더라.”

 

김제선은 다른 형제 세 명과 함께 하루에 두, 세 시간만 눈을 붙이고, 밤잠을 자지 않고 밤중에 다른 농장으로 가서 밤이 새도록 전도하다가 새벽이 되면 자기 농장으로 돌아와서 새벽 4시 반에 십장의 점고에 참석하였다. 이렇게 꾸준히 몇 달 동안 전도하여 김윤원, 이근영, 김성민 등 초초란 농장에 있는 동포는 거의 다 믿었고, 다른 농장에서도 믿는 이가 생겨나 교인이 17, 8명에 이르렀다. 김제선에 의해 전도를 받은 위의 김윤원이 대도에 기고한 “예수를 믿음이 만복의 근원됨을 깨달음”을 아래에서 읽는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또 사람을 지으사 가장 귀하게 하신지라. 그러나 이 죄인은 사람이 귀한 뜻도 알지 못하고 또 천불생 무록지인이란 말을 그릇 알고 주야 놀기에만 합당이 생각하여 주색잡기에 침혹하매 급기 폐가망신한지라. 기한을 견디지 못하여 쳐계라 하리로다. 겸하여 처음에는 교우가 유가단에 불과 45인이더니 지금은 거의 200명에 달하였고, 그뿐만 아니라 한인예배당을 세우기 주의하여 친목회를 조직할새 자본은 50원식이고, 목적은 실업이라. 단체됨을 설명하매 우선 회원이 100여 명에 도한지라. 이상 기록한 바를 생각하오면 하나님께 감사하옵고 김제선 씨의 신공이라 할만하도다. 그 외에도 큰 봉녹이 무궁하지마는 그만두고 우리 형제자매는 또한 생각할 바라. 가서 밖에서 땀을 흘리고 얻은 돈을 아까운 줄 모으고 내왕을 임금하는 곳에서 철도를 타고 다니면서 매도 맞고 갇히기도 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도 생각할 바요. 만리절역의 고생은 일반이되 수고를 불고하고 거관을 드려 월보를 창간하시는 미국 상항 감리교회 집사들을 보시고 이왕 믿는 형제자매는 더욱 견고히 믿고 안 믿는 동포는 하루바삐 회개하여 서로 사랑하기를 힘쓸지어다. 옛글에 말하였으되 욕수기신자는 선정기심하고 욕치기국자는 선제기가하라 하였고, 수신제가 연후에 치국평천하라 하였으니 회개하고 주를 믿은 후에야 나라 일도 하고 집안 일도 하고 자기 일도 할줄로 믿노니 유가단의 재류하신 대한동포 형제자매여 갱생할지어다."

 

1908년 6월에 김제선이 80페소나 아니면 100페소를 지불하고 농주에서 완전히 자유를 얻었다. 그해 10월 28일의 신한민보에 따르면 멕시코에 있는 동포 김제선 씨의 통신을 거한 즉 그곳 동포들이 점점 주인의 압제를 벗고 자유로 생활하는 자가 많았다. 그와 함께 자유의 몸이 된 자로는 김윤원, 황명수, 방경일, 신광희, 정춘식, 이근영 그리고 조병하가 있었다. 이에 김제선은 그해 7월에 64번가 428호에 집을 마련하고 생업을 이었다. 그해 10월 5일에 그는 이 집에서 전도회를 조직하였고, 주일이면 성경공부와 예배를 드렸다. 김재선의 주택은 한인들의 공공장소로도 사용되었고, 미국 상항에서 발간되던 공립신보의 발매소이기도 하였으므로 그의 동포 사랑을 엿보게 된다. 우편은 ‘메리다 사서함 229’로 가능했다. 

김제선은 각 농장을 다니며 복음을 열심히 전하였다. 1908년 말에는 교인이 100여 명이 되었다. 전도인의 활동비와 교회의 모든 재정은 교인들이 담당하였는데 초초란 농장에서만 교회를 위하여 쓴 돈이 530여 달러였으니 교인들이 받은 노동비를 모두 하나님께 바쳤던 것 같다. 

이근영이 1909년 1월 20일 자의 공립신보에 게재한 대로 공립신보를 위한 의연금 모집책이 김제선이었다. 그리고 메리다한인감리교회 교인이 공립신보 의연금으로 지화 5원을 기부하였는데 기부자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으나 김제선도 동참한 것으로 보인다.

멕시코 유카탄의 한인노동자가 4년간의 계약이 끝나면서 1909년 5월에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근영이 상항의 국민회에 자신들의 생존과 보호를 요청하면서 여비조로 50페소를 보냈고, 이에 국민회는 상항의 황사용과 나성의 방화중을 견묵위원으로 파송했을 때 상항한인감리교회 청년회는 그들의 여비로 6달러50센트를 지원하였다. 미국에서 두 대표가 도착했다는 소문에 한인 노동자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어 전도의 기회가 되었다. 이로써 1909년 전반에 교인이 300여 명으로 늘어나 예배당을 건축하기로 하고 700여 원을 헌금하였으나 건축헌금이 부족하여, 김제선은 1909년 4월에 유카탄 메리다 시내에 한 집을 세내어 예배당을 세웠다. 이는 3년 전부터 믿는 형제 네 사람이 장차 예배당 짓기를 위하여 헌금을 시작한 아름다운 결과였다.

 

멕시코 에네켄 농장서 혹사당하면서 열심 전도 

메리다한인감리교회 설립부터 4년간 전도 사역 

 

1909년 5월 9일에 메리다에서 16개 농장에서 온 총대 7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국민회 메리다 지방회가 결성되었고, 창립회원은 멕시코의 한인 노동자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314명이었다. 이때 김제선은 구제원에 선정되었다. 기타 임원에는 회장에 이근영, 부회장에 방경일, 총무 및 재무에 김윤원, 서기에 신광희, 학무원에 황명수, 법무원에 조병하 그리고 평의원에 김구현, 최정식, 이근하, 이국빈, 유진태, 김대선, 김성민, 김태진, 박선일이었다. 그 밖에 정원 외 임시 가선 임원은 서기 조민항, 외교원 황면주, 경찰 조민항 그리고 사찰 박인식과 박선일이었다. 이들 임원은 메리다한인교회의 교인이었을 것이다. 

예배당까지 마련한 교인들은 1909년 8월에 교사에 김제선을 선임했다. 그 외 교회 직원으로는 집사에 김윤원, 김성삼 그리고 이근영을 선출했다. 김윤원은 황해도 양반으로 고종의 황실 친위대의 고위인사였고, 이근영은 광무군 출신이었다. 이날 남자 21명, 여자 7명, 어린이 8명이 세례를 받았다.

방화중은 학교 등록을 위해 1909년 6월에 나성으로 돌아갔지만 황사용은 이듬해 1월까지 한인 노동자의 법적 사항을 처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도도 하였으니 메리다한인감리교회에 큰 유익을 끼쳤다. 상항한인감리교회는 메리다한인감리교회와 계속 밀접한 관련을 유지했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헌금했다.

1910년 4월에 메리다지방회가 신임 임원을 선출하였을 때 김제선은 평의원이었다. 그해 한일강제합방으로 ‘망국의 백성’으로 전락하였는데 설상가상으로 그해 말부터 멕시코 혁명이 본격화되면서 일자리를 찾아 얼마의 한인들이 메리다를 떠나면서 교회도 약해졌다. 그의 메리다 한인감리교회에서의 전도사역은 약 4년간이었다. 

1910년 12월에 김제선은 40여 명과 함께 프론테라로 이주하여 농주와 5년 계약을 맺고 철저한 자치제를 이루어 지방회 이름을 신한동(新韓洞)이라 하였고, 지방회를 조직했을 때 그는 법무가 되었다. 1918년 국치기념식에서 김제선이 기도하였다. 이후 이학서와 김경국과 함께 창가를 하였으며, ‘장래의 준비’라는 제하의 연설을 하였고, 이학서와 함께 ‘내 나라 위하여’라는 노래를 불렀다. 김제선은 베라쿠르쓰를 거쳐 1920년경에 탐피코로 이주하였고, 이곳 지방회 대의원으로 활동했다. 1920년대 말부터 안식교회가 시작되면서 한인감리교회는 쇠퇴하였는데, 김제선이 그때까지 한인감리교회를 인도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김제선은 오랫동안 신병으로 고생하다가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하였으나 1943년 6월 16일 상오 7시 30분에 별세하였으니 향년 61세였다. 그의 어머니가 소천한 지 16년이 되던 때다. 그의 부고에 부의를 보낸 자와 부의금은 강영호 10원과 술 두병, 김근필과 최창선 각 5원과 화환 1개, 김치환 5원, 차순재 3원, 한영석 2원, 하원여 1원, 이기봉 화환, 서데례사 화환이었다.

damien.sohn@gmail.com

09.0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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