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장 겸손하라
오늘 우리가 할 일은 과거의 나태함에 대해 주님 앞에서 겸손히 회개하고 장차 우리가 일을 행할 때 하나님께서 도우시도록 간구하는 것이다. 실제로 회개함 없이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우리를 도우실 작정이라면 먼저 그는 과거 죄에 대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실 것이다. 그러나 참 변화가 일어나려면 상당한 마음의 아픔을 겪어야 한다. 우리는 양들을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 많은 수고를 한다. 그러나 성경을 살펴보면 교회지도자들은 양들의 죄를 지적할 뿐 아니라 자신의 죄도 자복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부끄러움은 우리 인격에 미치는 것이다. 우리의 직분이 아무리 영광스러운 것이라도 그 영광이 우리의 죄를 막지는 못한다. 죄는 사람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1. 우리의 교만 때문이다
우리의 가장 악하고 분명한 죄 가운데 하나는 교만이다. 이 죄는 우리 중 아주 훌륭한 목회자들 가운데도 널리 퍼져 있는데 다른 이들의 교만보다 우리들의 교만은 더욱더 심각하고 용서할 수 없는 죄이다. 교만은 빛 가운데 서 있는 자들에 대해 시기심과 증오를 갖게 하며 무슨 수를 쓰든지 목자들의 영광을 퇴색시키거나 그 명망을 실추시키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교만은 설교를 빛내는 것이 아니라 비참하게 한다.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므로 우리의 은사를 통해서든 형제의 은사를 통해서든 그 목적이 이루어지면 감사한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다른 사람의 설교가 우리 설교보다 더 칭찬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하나님의 은사만 받고자 시기하는 것이요, 또 그들의 설교가 육신적 회중의 마음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그들의 잠자는 영혼을 전혀 깨우지 못하는 것이다.
은혜는 흔히 생각하듯이 성직자들에게 무조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복음의 목적은 우리를 낮추는 것이며 은혜의 역할은 우리 안에 겸손을 심고 키우는 것이다. 겸손은 그리스도인의 한낱 장식품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의 핵심부분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과 겸손하지 않다는 것은 상호 모순되는 용어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내게 배우라”(마11:29)고 하신 주님을 말씀을 따라야 한다.
우리의 업무는 양들에게 겸손의 귀중한 교훈을 가르치는 것이다. 겸손을 설교하는 교만한 목회자는 적어도 스스로를 정죄하고 있는 사람이다. 실제로 교만은 술 취함이나 색욕보다 더 큰 죄이다. 그리고 겸손은 절제나 순결보다 더 필요한 덕이다. 우리가 올바른 목회자가 되려면 우리 일에 올바른 원칙과 목적이 있어야 한다. 즉 그 일이 하나님을 위해 이루어져야 한다. 교만은 아무 특별한 은사 없이도 이를 이룰 수 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14:11).
2. 사역에서 경솔하고 부당하게 우리 자신을 열심히 드러내려 하기 때문이다
1)공부를 태만히 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맡은 바 일에 제대로 헌신하고 있다면 우리는 공부를 게을리 하면 안 된다.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 없이는 사람이 결코 박식하거나 현명해질 수 없다.
2)지루하고 따분한 설교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진심으로 우리 일에 헌신한다면 대개의 경우 지금보다 훨씬 더 열정적으로 또 보다 더 진지하게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권하노니 설교단에 올라가기에 앞서 자신의 마음을 일깨우려고 애쓰라. 그래야 졸고 있는 죄인들의 마음을 깨울 수 있을 것이다.
설교의 내용뿐 아니라 설교의 태도도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전9:10)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인간의 구원을 위한 설교 같은 일은 정말 혼 힘을 다해 열심히 행해야 한다. 또 필요하면 때에 따라 말씀을 실생활에 적용하는 부분에서는 목소리를 높이고 열을 올려야 한다. 목사가 설교하는 내용뿐 아니라 목사의 설교 태도를 통해서 함께 역사하신다. 대부분의 회중들에게는 설교자의 음성과 어조가 매우 큰 영향력을 미친다. 아무리 좋은 내용도 감동적으로 전달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없다.
우리와 회중들은 나름대로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을 갖고 있으므로 우리의 생각과 사랑을 온전히 전달하여 그들의 긍정적인 응답을 얻을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양들에게 전해야 하는 위대한 일들은 나름대로 충분한 근거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도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종류의 증거를 다 동원하여 양들에게 그 내용을 이해시키고 모든 훈계와 경고를 통하여 그들의 헛된 반대를 무찔러서 기필코 그들이 진리의 힘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3)갈급한 회중들을 불쌍히 여기거나 도와주지 않기 때문이다
3. 우리가 그리스도의 관심과는 배치되는 세상 관심에 너무 쏠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당연히 자신과 자신의 모든 소유를 하나님 섬기는 일에 바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지나친 세상적 관심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1)세상 풍조를 따름으로써 그러하다.
2)세상일들을 너무 걱정함으로써 그러하다. 우리는 세상적인 염려가 너무 많지 않는가?
3)자선 사업을 게을리 함으로 그러하다. 우리는 자선행위와 주님께 대한 봉사를 넓히는 데 인색한지도 모른다. 자선행위는 편견을 강력하게 제거해주며 경건의 말씀들에 대해 마음의 문을 열어준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육체에 도움을 주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으며 이는 그들을 하나님께 이끄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로 이끄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사람들의 회심을 막는 큰 장애 중 하나도, 편견을 제거하는 훌륭한 수단 중 하나도 목사 자선이기 때문이다.
목사는 일반적 자선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경건을 보여야 한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주님께 바쳐져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5:8).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주신 이유는 가난한 친족과 가족을 충분히 부양할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버려두어 교회가 공동 부양하도록 만드는 사람들을 경고하기 위함이었다.
교만은 색욕보다 더 큰 죄, 겸손은 절제 순결보다 더 필요한 덕
목회자가 자신을 드러내고 세상 관심에 너무 쏠려 있으면 안돼
바울의 말씀은 장래를 위해 재물을 쌓아두라는 뜻이 아니고 현재를 위해 돈을 쓰라는 뜻이다.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주고 교회로 짐 지지 말게 하라 이는 참 과부를 도와주게 하려 함이니라”(딤전5:16). 여러분도 다른 사람들이 하듯이 자식들을 교육해야 한다. 자녀들 교육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목회자들이 무절제에 대한 시험에 너무 오래 노출되어 있는 것은 좋지 않다. 잘못해서 목사들이 넘어지면 자신과 교회에 큰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결혼을 해야 하는 사람은 자신과 자녀들을 부양하기 위해 재물을 쓰되 육체적 수단이 제공할 수 있는 비율만큼만 그들을 위해 쓰고 교회적 수단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은 가능한 한 교회봉사를 위해 바쳐야 할 것이다.
혈과 육은 우리에게 재력을 지녀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성직자의 재력이라 해봤자 비유에 나오는 부자의 재력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눅16:19). 만약 비유 속의 부자처럼 가장 화려한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재력을 가진 것이 아니다.
재물을 멸시하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실제로 자기 삶에서 그렇게 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자기 부정을 설교하는 사람은 양들 앞에서 이 덕을 실천해야 한다. 목회자나 그의 양들은 다같이 “주님께서 쓰시도록” 거룩하게 바쳐진 자들이다. 그런데 목회자들은 이중으로 봉헌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또 목회자로서 하나님께 바쳐져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할 이중적 의무를 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불합리한 기대에 일일이 다 부응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양심과 모든 의인들의 기대에는 부응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벧전2:15). 문제는 우리의 가장 큰 적은 사탄임을 알아야 한다. 사탄은 목사가 양들의 파멸에 동조한 데 대해 매우 기뻐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비난하지 않는다 해도 그대의 죄는 정상이 참작되지 않는다. 그대는 멀지 않아 양들이 영생을 놓치고 영벌에 빠지게 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살비아누스(Salvianus, 390-484)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사랑하는 자만큼 더 구원을 무시하는 자는 없다.” 하나님을 경멸하는 자는 자신의 구원을 경멸하는 자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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