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개혁의 땀방울- 무엇을 기대할까? (36)

부제: 교회사가 가르친다!(22) - 거룩한 삶

거룩한 부담

 

신실한 기독교 신앙인들은 자신들이 거룩한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 핵심은 세상으로부터의 분리 또는 구별된 삶이다. 성경은 회심 전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며 살았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은 뒤 하나님께 속한 자답게 살아야한다고 분명히 가르친다. 세상에 속해 살아가는 환경 속에서도 세상의 것을 본받지 말라는 것이다.  

거룩한 삶은 반드시 마음의 결단과 행동의 변화를 동반한다. 신앙인으로 구별된 삶의 모습은 주위사람들도 알 수 있다. 사실 신앙인에게는 일종의 거룩한 부담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자신이 신앙인이라는 사실을 밝힌 뒤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은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제법 크기에 자연히 자신의 행동의 영향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물론 거룩한 부담은 외식주의에 빠지게 한다. 남을 지나치게 의식하여 무엇인가를 보여줌으로 인정을 받으려할 때 외적인 요인에 지나친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려는 순수한 동기를 지닌 성도 역시 과연 거룩한 삶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에 대해 혼동할 수 있다. 가장 일반적인 것은 이를, 예수를 믿기 전에 행하던 습관을 중단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일 것이다. 특히 한국인들은 술과 담배를 끊는 것을 가장 중요한 신앙적 결단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이외에도 세상적인 유흥을 즐기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정리하거나 평상시 자신이 지나치게 좋아하던 세상적인 놀이를 과감하게 포기하는 것도 있다. 

이런 행동의 변화가 지닌 가치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이 세상의 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신앙인다운 변화된 삶을 결단하는 것은 매우 귀한 일이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거룩한 삶이란 가시적인 습관의 변화보다 더욱 심오하고 신중하다. 무엇을 하고 하지 않는가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넘어 성령의 도우심 속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어떤 사람으로 변화되었는가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한다. 하나님을 의식하며 거룩한 부담을 지니고 있는가에 대한 신앙적 정리가 요구된다. 

 

종교개혁 이후 

 

16세기 종교개혁을 기점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이 성도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가 신중하게 진행되었다. 중세 로마가톨릭교회는 믿음을 지닌 성도라면 하나님의 의를 얻기 위해 반드시 선행의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죄인의 구원과 관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언급하면서도 이는 신앙적 행위를 통해 얻어지는 것임을 강조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들을 상대로 초대교회에서 시작된 신학논쟁의 연장전을 치른 것이다. 

초대교회 신학을 집대성한 교부 어거스틴(354-430)은 구원에 관하여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였으나, 펠라기우스(345-418)는 인간의 의지가 큰 역할을 담당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중심에는 인간의 부패에 대한 차이가 있었다. 어거스틴은 인간은 아담의 원죄로 인해 선한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였기에 오직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구원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에 반하여 원죄를 부인한 펠라기우스는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유전되지 않기에 개인의 자유의지와 노력에 의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의 노력으로 어거스틴의 사상이 회복될 수 있었다. 나아가서 그들은 이미 구원을 받은 자가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며, 그들의 영향 하에 각자의 신앙적 전통을 세워가기 시작하였다.   

종교개혁의 선구자였던 마르틴 루터(1483-1546)는 이신칭의 교리를 강조하였다. 그로부터 영향을 받아 세워진 한 전통은 인간의 의를 드러내는 모든 행위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받아들인다. 성화가 가능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의 결과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은 것처럼 성화도 오직 인간의 도덕적인 삶이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어떤 선행이나 신앙의 행위를 통해 신앙인이 더욱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성화의 주체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전통이 칭의를 얻은 이후 성화를 위해서도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신앙인은 언제나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옛 사람의 문제와 씨름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새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옛 사람이 죽어야 하는데, 의롭다 칭함을 받았지만 항상 죄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신앙인이 자력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성화가 가능하다고 본다. 로마가톨릭교회가 성화 안에 칭의를 포함시킨다면 루터의 전통은 이와 반대로 칭의 안에 성화를 포함시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성화에 대한 다른 전통은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1509-1564)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자들에게서 발견된다. 이들 역시 성화가 완전히 부패한 인간의 노력으로 불가능하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인간은 완전히 부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성화에 관하여 루터와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방법을 취하는데, 그것은 성화와 칭의를 구분하지 않은 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가능하다고 해석한다. 성부의 계획대로 성자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이루어진 구원이 성령에 의해 죄인에게 적용된다. 즉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지상에서 거룩한 삶을 이루신 것은, 자신에게 연합되어 있는 성도들의 성화를 위한 것이었다고 확신한다. 

이들은 루터의 전통 속에서 고민거리였던 옛 사람에 대한 문제가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해 이미 해결되었다고 본다.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 죄로부터 자유를 얻은 상태에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갈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있다면 어떤 일을 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성화가 가능할까? 갑작스레 성화가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성화를 위해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의 모습을 회복해 나가는 영적훈련을 치러야 한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세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주님을 따라가며 지속적으로 그를 본받아야 한다. 이들은 성화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과 성찬과 같은 은혜의 방편도 중시한다. 

 

새로운 전통 

 

감리교회를 창설한 요한 웨슬리(1703-1791)에 의해 성화교리에 관한 새로운 전통이 세워졌다. 어려서부터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웨슬리는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생겨난 자연신론이 신앙인들에게 영향을 끼치던 현실 속에서 영적 각성을 위해 형식적인 신앙의 테두리를 벗어버리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성화란 믿음의 결과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고 그를 따르는 자들이 생겨났다. 이 전통의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온전한 거룩에 이룰 수 있는가에 있다. 성화는 거듭날 때 시작해서 그 후로 점진적으로 성령에 의해서 거룩한 자로 성장한다. 성도는 반드시 성경읽기와 기도 그리고 다른 필요한 경험적 수단들을 통해 성화를 이뤄야 한다. 특히 하나님을 향한 구도자의 자세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모두가 아니다. 완전 성화라는 고차원의 두 번째 단계가 있는데, 이때 성도 안에 있는 죄가 완전히 파괴된다. 물론 갑자기 전혀 무흠한 성자의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한 이 완전한 상태란,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가 항상 지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18세기 미국에서 1차 대각성운동이 일어났다.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인물은 칼빈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조지 휫필드(1714-1770)로서, 웨슬리와 함께 대학에서 공부를 했던 인물이었다. 한편 웨슬리의 성화론은 19세기 미국의 성결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영국에서 출발한 감리교가 미국에 전해지면서 완전성화 교리 역시 함께 전해졌다. 특히 미국에 와서 부흥운동을 배경으로 즉각적 결심의 형태를 지니게 되었는데, 향후 믿음으로 성화가 가능하다는 확신은 미국의 제2 대각성을 이끌었던 부흥사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십자가 구원 받아들이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믿는 신앙형태 인기

교회개혁은 성경적 신앙 추구, 거룩한 삶은 가시적 습관 변화보다 더 신중

 

 

한국교회의 상황

 

현재 한국교회 안에 완전주의적 요소가 깊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이 사실이다. 초기 한국을 찾은 선교사들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그들은 신학자들이 아니었고 목회경험도 없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교지를 찾은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신학을 세밀하게 논하는 것은 무리가 될 수 있다. 단지 시기적으로 볼 때 그들이 2차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에 틀림이 없다. 

드디어 한국교회의 성화론을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사항이 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한국교회 안에 성화론이 불완전하게 정착한 이유를 알 수 있다. 하나는 기독교가 유교와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는 것이다. 동양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은 불교는 전적으로 배제하였으나 유교의 장점을 기독교에 접목시키려는 시도가 있어왔다. 그 결과 교파를 초월하여 성도들이 일종의 수양적 형태를 통해 완전한 상태로 나아가는 성화의 사상을 쉽게 수용하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신실한 성도들은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에 대한 보답을 어찌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는 형태를 취하게 하였다. 자기수양을 강조하는 한국인의 전통적 종교성에 맞춰 열렬한 기도생활과 성경묵상이 보편화 되었다. 자신이 성화의 주체라는 신학적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의 신앙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고의 틀 속에서 행위를 강조하는 신앙심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외국에서는 하나님의 선택사상에 대한 강조로 인해 율법폐기론 또는 방종주의가 성행하기도 했으나, 한국교회 성도들은 이 교리를 운명론으로 이해하면서도 줄곧 자신에게 신앙적 책임을 물으려는 경향을 지녀왔다. 이와 맞물려 한국교회 성도들은 신비한 경험에 대한 갈급함을 채우기 위해 장시간 금식하거나 밤을 새며 열렬히 기도하는 신앙을 소중히 여긴다. 자신의 죄와 무능력을 깨우친 성도일수록 더욱 영적 체험을 갈망하여왔다. 

거룩한 성도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경적 모습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성화론은 매우 혼동스럽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노력이 불완전하게 결합되어있다. 또한 성경적 진리와 전통적 종교성이 혼합되어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값싼 복음, 즉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구원을 이루셨으니 받아들이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믿는 신앙형태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거룩한 삶에 대한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예 성화를 신앙적 고민거리로 여기지 않는 편안한 신앙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있다. 교회의 개혁은 성경적 신앙을 추구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covenantcho@yahoo.com

06.05.2021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