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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생각하며

가까운 친구들이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연이어 들은 것은 작년이었다. 봄부터 여름에 걸쳐서 세 친구가 힘든 소식을 차례로 전해왔다. 친구들이 전한 암 소식은 마음에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매일의 기도에 친구들을 위한 탄원과 간구가 계속되었다. 친구들이 수술 이후에 힘든 항암치료를 견디며 버티어온 것은 하나님을 의지한 힘도 있었겠지만 회복될 수 있다는 소망 때문이었다. 그런데 세 친구 모두 항암 치료를 마친 후 곧 다시 암이 발견되었다. 

친구들의 생명을 위해서 기도하던 나에게도 친구들의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마음을 가다듬으려 하지만 기도는 언어를 잊어버린 채 눈물이 된다. 물론 친구들 모두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두 사람은 전도사, 한 친구는 권사로서 믿음 안에 서 있다. 또 한 번의 어려운 수술을 마치고 회복 중인 친구는 유한한 시간, 마음 준비하게 하시고 평안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힘내려고 자신을 자꾸 다독이고 있다고 글을 보내왔다. 새로운 항암치료의 효과가 없으므로 임상실험용 약을 시도해보는 것 말고는 이제 아무 방법이 없다는 말을 들은 다른 친구는 평상시처럼 살다가 가는 준비를 하는 것으로 마음을 잡았다고 카톡을 보냈다. 

요한계시록을 통해 영광스러운 주님의 나라를 엿보기도 했고 사랑하는 주님 곁으로 갈 그 날을 사모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주님 곁으로 가는 그 과정을 힘들게 겪을 친구들이 안스럽고 마음 아프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는 수많은 성경 구절들과 기도의 능력에 관한 말씀들이 다 힘을 잃는 것 같은 침체의 시간이다.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먼저 데려가는 것 같아요” “이 땅에 사는 것보다 더 좋은 나라에 가는 것이죠” 사실이지만 무심한, 좋은 의도로 건네는 위로의 말들이 나를 더 짜증나게 한다.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나도 친구들도 우리의 모든 고통을 아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기를, 그 임재가 현실의 평안으로 다가오기를 기도할 뿐이다.

우리 모두가 새로운 삶으로 태어나기 위해 언젠가 한번은 통과해야 할 과정인 죽음이 왜 이렇게도 낯설고 두려운 실재가 되어버린 것일까? 어느 북 클럽에 죽음에 관한 책을 추천하려고 했더니 한 분이 “그것은 좀 그렇죠?”라고 얘기하셨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왜 우리는 죽음이라는 단어 자체를 터부시 할까? 친구들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부인할 수 없는 죽음의 실체를 바라보면서 죽음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수년 전 조카 같은 젊은 청년이 암으로 투병할 때 그 청년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힘들어서 죽음에 관한 책들을 찾아 읽었었다. 책장에 꽂혀 있던 그 책들을 다시 꺼내 들고 읽기 시작한다. 

헨리 나우엔은 과연 우리가 태어날 때 부모님들이 우리의 출생을 세심하게 준비했듯이 죽음도 그렇게 준비할 수 있는 것인지 질문한다. 이 땅의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분의 온전한 사랑에 둘러싸여 아무 것도 알려진 바 없는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일이 죽음이다. “죽음, 가장 큰 선물”이라는 책은 나에게 묻는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지? 또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음을 잘 맞이하도록 서로 도와주고 있는지? 언제까지나 우리가 그들의 곁에 있을 것처럼 가정하고 있지는 않은지? 

삶은 아름답다. 아무 걱정 없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을 볼 수 있고 집 앞에 핀 장미꽃 냄새를 맡아볼 수 있는 하루하루의 삶은 귀하다. 그러나 그 분께서 정하신 시간이 되어 “이제는 본향으로 가자”고 말씀하실 죽음의 날도 삶처럼 아름다워야 할 것이다. 두려움이 아닌 기쁨으로 이 세상에 남기고 갈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주님께 가는 죽음이 되도록 나의 죽음뿐 아니라 친구들의 죽음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할 것 같다. 생명의 연장을 위한 기도를 넘어서서 평안 가운데 주님의 손을 꼭 잡고 참 생명의 나라로 옮기어 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 같다. 

 

 lpyun@apu.edu

05.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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