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와 성직자
1960년대부터 교회 내의 평신도의 위치와 사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전까지는 성직자를 돕는 역할로 이해되었던 평신도의 고유사명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그 출발은 1960년에 ‘평신도신학’을 저술한 선교학자 핸드릭 크래머(Hendrik Kraemer, 1888-1965)에 의해 이뤄졌고 그 후로도 평신도에 관심을 지닌 학자들에 의해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들의 공통적인 주장은 성직자 의존적인 평신도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교육과 훈련시켜 능동적인 위치에 서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70년대에 들어와 평신도에 대한 이론적 고찰을 넘어 실제적인 운동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전 세계적으로 평신도훈련원이 세워졌다. 평신도들을 교회내 또는 사회를 대상으로 활발하게 움직이게 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였다. 이에 편승하여 대부분 교회가 제직세미나 또는 평신도강좌 등을 실시하며 건강하고 활력이 넘치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평신도가 맡아야할 역할을 알리고 훈련시키는 일에 매진하게 되었다. 제자훈련에 혼신을 쏟았던 한국의 유명한 목회자가 저술한 ‘평신도를 깨운다’도 이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토록 평신도들이 지니고 있던 잠재력을 이끌어냄으로 교회의 활성화가 이루어진 것은 참으로 감사하고 다행스런 일이었다. 헌신된 평신도들을 통해 교회가 더욱 든든히 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평신도의 위치가 확고해지면서 성직자와 마찰이 생겨났고 이로 인해 교회가 불필요한 일에 힘과 시간을 소비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수직적 관계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근거하여 모두 동등하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심지어 성직자들은 새롭게 부임하고 사임하지만 평생 교회에 남아있는 평신도들이 주인의식을 지녀야한다는 여론이 생겨나기도 했다.
이런 변화의 역사적 배경에는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전 세계적으로 찾아온 의식세계에 변화가 있었다. 17세기 계몽주의 이후 역사가 물려준 전통을 거부하고 인간의 가능성이 지닌 가치를 높이 평가해왔지만 1차, 2차 세계대전으로 이후 속박으로부터 자유하려는 열망이 높아진 것이다. 식민지들은 줄줄이 독립을 선언하였고, 해방신학의 내용과 같이 억눌렸던 자들이 평등을 주장하였으며, 각 나라마다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기 위한 민주화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 뿐 아니라 개인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면서 다양성이 중시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사회적 변화가 교회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한국교회는 조사 영수 권사 등 존재, 평신도 따로 깨울 필요 없어
평신도는‘흩어지는 교회’...모든 직업은 소명, 맡은 직분 감당해야
큰 변화
1960년대에 로마가톨릭교회가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을 세상에 보이기 시작했다. 1962년부터 1965년까지 개최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기점으로 현대사회에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변화의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이 모임에서 결정된 여러 사항 중 향후 구교 전반은 물론 신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은 그들이 제정한 ‘교회헌장’의 제 4장 ‘평신도의 위치와 역할’이다.
로마가톨릭교회는 교황을 우두머리로 하는 수직적인 구조를 지녀왔다. 313년 종교의 자유를 얻고 후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자리하면서 성직자의 위상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교회와 정치의 공조 속에서 공적 신분을 지닌 만큼 많은 특권과 혜택을 누렸다. 381년에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로마제국이 게르만족의 이동의 영향으로 476년에 멸망한 뒤 정치적 공백상태에서 교황권을 강화되기 시작했다. 교황 그레고리 1세(Gregory I, 540-604)가 중세초에 초석을 놓은 이후 ‘교황주의’가 자리를 굳혔다. 교회수장이었던 교황이 세속국가와 힘겨루기를 하며 얻어낸 확고한 위치가 교회내에도 고스라니 적용되어 교황을 우두머리로 하는 철저한 상하관계가 강조된 수직적 구도가 형성될 수 있었다. 교황아래 추기경, 대주교, 주교, 사제, 집사, 서리집사 등의 계층질서에서 평신도의 위치는 가장 밑바닥에 놓여있었다. 교황은 하나님을 대리하는 위치에서 절대적인 신적 권한을 지니고 있었고, 사제들은 7성례(세례, 견신례, 성찬, 고해성사, 종유, 서품, 결혼성사)를 집전하며 구원의 은혜를 매개시키는 중보자들이었기에 평신도들은 그들에게 복종하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중세를 지나는 동안 로마가톨릭교회는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이원론적 구조를 심화시켰다. 성직자들은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 평신도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첫째는 그들의 평범하지 않은 생활모습이었다. 성직자들의 복장과 두발 모습이 일반인과 달라 멀리서도 그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수도원에 몸을 담고 있는 수도사들은 사회에서 정상적인 삶을 포기하고 엄격한 규율에 맞추어 생활하고 있었고, 교회에서 사역하던 사제들은 6세기 이래 독신으로 지내며 교회 건물을 중심으로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두 번째는 성직자들이 받았던 교육이다. 11세기에 들어 정식 교육제도가 생겨나기 전까지 중세인들은 교육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다. 교육은 성직자와 일부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특히 8세기 이후 서방 유럽교회는 라틴어를 사용하였기에 자연적으로 이 언어를 배워 구사할 수 있는 성직자와 그렇지 못한 평신도 사이의 차이가 생겨났다. 물론 모든 성직자들이 라틴어에 능통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미사를 집전할 정도의 기본은 익혀야만 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중세 로마교회의 계층적 성직체제에 반기를 들었다. 특히 모든 거듭난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 루터의 만인제사장설은 당시 가톨릭교회에 위협적인 선언이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종교개혁자들의 의견을 적극 거부하였을 뿐 아니라 교황중심의 수직적 체제의 중요성을 재확인하고 더욱 확고히 하였다.
이런 전통을 지닌 그들이 1960년대에 들어 변한 것이다.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상하 관계를 타파하려 했다. 평신도들을 성직자의 협력자로 인정하고, 이들 모두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교회 안에나 사회에서 그 누구에게도 불평등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새롭게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의 변화는 향후 평신도와 성직자 사이의 관계에 대해 분명한 평신도신학이 정립되지 않은 개신교회가 혼동과 갈등을 경험하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평신도의 활동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평신도들의 활발한 활동으로 인해 속한 시일 내에 선교사들로부터 자립할 수 있었다. 선교사들은 복음을 받아들인 평신도들이 열정적으로 교회를 섬기는 모습에 사뭇 놀라게 되었다. 선교지라는 특수적 상황 속에서 교회 안에 평신도 사역자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조사’는 신학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목회활동을 하며 선교사들을 보좌하였다.‘ 영수’는 교인을 대표하고 위치에서 ‘조사’를 돕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여자 성도들 가운데 덕망이 있고 헌신된 자들을 ‘권사’로 임명하였다. 나아가서 ‘임시’라는 뜻을 지닌 ‘서리집사’ 제도를 도입하여 교회의 활성화에 이바지 하였다. 한국교회는 평신도들을 따로 깨울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일본과 보호조약을 맺은 뒤 국가의 수교권을 빼앗긴 상황 속에서 부패한 정부와 정치가들에 대해 실망한 백성들은 기독교에서 소망을 찾기 시작하였다. 개인적으로 교회에서 영적 안식을 찾았고 공동체적으로 나라 구할 길을 모색하며 애국을 실천하였다. 전체 인구의 1.3%에 불과하였던 기독교인들이 1919년 3.1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그 결과 의식 있는 자들이 교회에 찾게 되었다. 평신도들이 공산치하와 6.25전쟁 기간에도 나라의 운명을 함께 염려하며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근대화 시대의 평신도들은 복음전파에 매진하고 성전건축을 위해 희생을 아끼지 않았으며 근면과 절약 그리고 도덕적인 삶을 신앙의 덕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담당하는데 앞장섰다.
이런 역사를 지닌 교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사회를 향해 영향력을 행사하던 과거와 달리 사회의 시선이 교회를 향하고 있고 교회내의 문제들이 막강한 힘을 지닌 세상 여론의 도마에 올라가고 있다. 교회 내에도 개혁을 주장하며 여론을 주도하는 그룹이 생겨나면서 현재까지 성직자과 평신도의 위치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소명
‘평신도신학’을 저술한 송인규 교수는, 평신도의 하는 일을 ‘흩어지는 교회’라고 개념으로 설명한다. 교회라면 주로 모이는 것을 생각하는데, 평신도들은 세상 속으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일주일 내내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 삶 자체를 예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소명’이라 할 때,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아 신학교에 가거나 평신도로 해외 선교에 헌신하는 특별한 경우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16세기 종교개혁가들이 주장한 바, 모든 직업이 거룩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전업주부나 공무원, 기업인이나 교사 등 직종을 막론하고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이기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성직자와 평신도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부르셨다. 교회 내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내용도 서로 다르다. 베드로전서 2:9에 근거하여 세례를 받는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 제사장의 신분으로 살아가지만, 성령의 은사에 따라 다른 봉사직무를 맡아 감당한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평신도가 성직자보다 결코 열등하지 않다. 수직관계에서 종속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소명이 다르다는 사실은 서로 인정해야 한다.
성경에는 평신도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을 통칭하는 ‘라오스’라는 집합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이로부터 평신도를 의미하는 ‘lay’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두 한 마음으로 교회를 섬기며 복음전파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고 확신하였다. 교회의 수가 늘어나면서 조직이 필요하게 되었다. 2세기가 되어 주교를 중심하는 지도체제가 생겨났고, 3세기에는 교회 내에서 직무를 맡은 성직자와 그렇지 않은 평신도의 구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교회공동체 안에는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이원론이 존재하지 않았다. 소명이 다른 것을 서로 인정하고 세워주면서 세상과 대치하는 신앙공동체라는 확고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중세교회 시대에 초대교회의 모습과 달리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 분리가 생긴 것이다.
성경적인 교회는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 그릇된 이원론을 거부한다. 서로 하나님의 부르심이 다르며 각자 맡은 고유한 일이 모두 소중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목회와 성경에 대하여 성직자 보다 많이 알고 경험이 풍부한 평신도가 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남의 일에 전문가가 되지 않고 나에게 맡겨주신 일에 더욱 충실하게 임하는 자세이다. 성직자는 평신도들이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을 위해 은사를 마음껏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무쪼록 성직자와 평신도가 직분과 상관없이 한 마음이 되어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교회에 허락하신 귀한 사역에 집중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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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