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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선교 “복음과 사랑의 실천” (7)

뉴저지밀알선교단 단장 강원호 목사

헨리 나우웬이 받은 천주교신학교 교육은 육체를 죄악시했다. 그래서 그는 육체적인 친밀성을 경험할 수 없었다. 그는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외로웠다. 헨리 나우웬은 아담을 통해 예수님의 육체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셨다. 육은 주님이 만드신 선하신 것이다. 육을 무시하기 때문에 헛된 이론들이 많이 나왔다. 사람과 가까워진다는 것은 그의 육체와도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나우웬은 아담의 육체에 가까워짐으로 아담 자체에 가까워졌다. 나우웬은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아담과 함께 일하면서 데이브레이크의 중심에 서 있는 아담 자신을 보기 시작했다. 라르쉬의 설립자인 장 바니에가 얼마나 자주 내게 이런 말을 했던가! ‘라르쉬는 말에 입각하여 세워진 곳이 아니라 몸에 입각하여 세워진 곳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몸을 위탁받은 특권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나의 모든 삶은 단어, 사상, 책, 백과사전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내 우선순위가 바뀌고 있었다. 내게 중요해진 것은 아담 그리고 우리가 함께 보내는 특권 같은 시간이다. 그가 완전히 연약한 상태로 자기 몸을 내개 맡길 때, 내가 그의 옷을 벗기고, 목욕을 시키고, 다시 옷을 입히고, 음식을 먹이고 여기 저기 걸어 다닐 수 있도록 그 자신을 내어줄 때 주어지는 그 시간 말이다. 나는 아담의 몸과 가까워짐으로써 아담과 가까워 졌다. 나는 천천히 그를 알아가고 있었다.”

헨리 나우웬은 아담을 통해 육체의 중요성을 알았다. 아담은 정신적인 사고를 잘 할 수 없는 존재였고 육신으로 존재하였다. 사람은 육신을 통하여 서로가 우정을 나누며 사랑한다. 육신이 없는 사람을 생각해볼 수 없듯이 아담은 육신을 통해 나우웬에게 육신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었다. 

헨리 나우웬은 아담을 통해 예수께서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온전히 알게 되었다. 아담은 그의 육체로 나우웬을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 소속이 되도록 인도하였다. 아담은 나우웬이 데이브레이크에 뿌리 내리게 하였고 공동체 일원으로 소속감을 가지게 하였다. 육체는 영혼을 담는 그릇일 뿐 아니라 영혼이 자라라는 토양이다. 흙이 없는 나무는 생각해볼 수 없듯이 인간 존재는 육체라는 땅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제 4절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의 수난과 겸손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고난도 감수하는 겸손을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라고 고난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는 모든 인류가 겪는 고난을 경험한다. 장애인 아담의 고난을 통해 겸손히 고난까지도 감수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증거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수동적으로 고난을 당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임을 확신 가운데 드러내셨다 인간의 원죄의 뿌리는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한 인간의 교만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이 창조주가 아니고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선악과 금지의 계명을 어기고 하나님처럼 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사탄의 종이 되었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려는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뜻에 순종함으로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게 된다.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2:6-7).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여 왕이나 장군이 아닌 로마 식민지 지배하에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심으로 겸손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그 겸손 자체가 수난이다 아담도 건강한 몸이 아닌 연약한 장애인의 모습으로 이 땅에 왔다. 연약한 아담을 통해 예수님의 겸손을 볼 수 있다. 나우웬은 이렇게 말한다. 

 

장애인 아담을 통해 예수님의 겸손과 수난을 볼 수 있다. 

겸손의 진정한 의미는 수난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아담의 어린 시절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예수님의 가정생활과 병행되는 모습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은 권세와 힘을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연약함의 옷을 입고 오셨다. 그 분의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부분은 아이로서, 청소년으로서, 발버둥치는 청년으로서, 성숙한 성인으로서 인간의 상황을 공유하신 숨겨진 부분이다. 나사렛 예수의 삶처럼 아담의 숨겨진 삶은 수많은 사람을 위한 사역의 때를 앞두고 눈에 보이지 않은 준비를 한 시간이었다. 나는 아담이 제 2의 예수님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예수님의 연약함 때문에 아담의 극도로 연약한 삶을 최고의 영적 의미가 있는 삶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아담은 독특한 영웅다운 장점을 소유하지 못했다. 그는 신문기사에 나오는 어떤 사람보다 뛰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아담이 자신의 상처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증인이 되도록 선택받았다고 확신한다. 이것은 그를 낭만적으로 묘사하거나 감상에 빠지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아담은 우리 모두처럼 한계가 있는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더 자신의 한계가 많고 말로 자신을 표현할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연약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놀랄만한 도구가 되었다. 그는 우리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계시한 자가 되었다.”

전능하시고 자유로우신 분이 유한한 인간의 형체를 입고 오신 것 자체가 예수께서 장애를 입으신 것과 같다. 장애는 상대적으로 자유롭지 못하고 힘의 제약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필자는 장애인 아담을 통해 예수님의 겸손과 수난을 볼 수 있다. 겸손의 진정한 의미는 수난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대접받을 기대하고는 누구나 겸손할 수 있다. 겸손한 것이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겸손하고도 고난을 당한다면 진정 겸손하지 않고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예수님은 자신이 겸손을 수난으로 증명하셨다. 아담도 수난을 당하였다. 그는 많은 장애인들이 경험하는 사회적 관계 단절의 고통을 겪었다, 

아담은 학교에서 요구하는 기준에 미달되었고 이것은 그의 어린 시절을 더 고립되게 만들었다 그는 결국 열 살이 되어서야 학교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발작증세 때문에 지각이나 조퇴를 해야 했다. 그의 사회생활이 그랬던 것처럼 학교생활도 제한되어 있었다. 아담은 생일파티에도 초대받지 못했고 어린 시절 대부분을 가족과 함께 집안에서 숨겨진 채로 보냈다.

아담은 또한 신앙생활하는 데도 단절되어 고통을 받았다. 장애를 가지게 되면 예배나 성찬식에 참여하거나 찬양이나 기도회도 참여하기 힘들다. 아담은 교회에서도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아담이 신체장애 때문에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 함께 세례식과 성찬식을 참여할 수 없음을 알았을 때 부모의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담은 육신적 아픔 때문에 고통을 받았다. 장애인의 고통은 신앙적인 고통, 사회적 단절의 고통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육신의 고통을 받고 있다. 많은 장애인들이 육신의 고통을 당하고 있다. 소변 때문에 요도감염, 일어날 때 통증, 잘린 다리부분에 환상통이 오기도 한다. 다리가 잘렸지만 뇌는 그것을 기억하고 통증을 일으킨다. 아담의 육신적 고통을 나우웬은 이렇게 말한다. 

“발작증세 때문에 새로운 처방을 내린 의사들은 예전의 약물을 무효화시키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며칠 동안 아담에게 약을 과다 복용시켰다. 그 결과 아담은 영구적인 손상을 입었고, 이 일이 있은 후에는 결코 이전과 같지 않았다. 힘도 거의 없어졌고, 혼자서 돌아다니고 자신의 행동을 지시했던 모든 능력을 잃어버렸다. 이제 걸어 다니는 데도 도움이 필요했고, 때로는 들어서 옮겨야 했다. 발작도 자주 일어났고 탈진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위장이 좋지 않거나 다른 불편 때문에 감정상태가 좋지 못할 때면 그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찾아 부드러운 포옹으로 그들을 조용히 끌어안았다.”

miju92@gmail.com

05.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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