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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교회사가 가르친다!(20) - 직분의 이원론 (1)

개혁의 땀방울- 무엇을 기대할까? (34)

목회자와 평신도 

 

한국 장로교회에서 최초로 안수 받은 목사가 배출된 것은 1907년이었다. 그렇다면 이전까지의 한국교회의 상황은 어떠하였을까? 초기부터 지도자의 위치의 선교사들과 그들의 지도를 받았던 평신도라는 2중구도가 지속되었다. 안수 받은 목사가 세워지기 전까지 오직 외국선교사만 목사신분으로 세례를 베풀 수 있었다. 따라서 성도들은 직, 간접으로 이들의 영향 하에 놓이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교회에 출석하면 무조건 세례를 베풀어 교인의 수를 늘려 본국선교부에 보고하는 우매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받아들인 결과 진정한 회심을 경험하였으며 믿음의 결단을 지니고 있는지 확인하는 일에 힘썼다.  

이런 구조는 1907년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목회자들이 다수 배출되어 자체적으로 교단이 구성하고 운영되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되어야 했다. 성도들은 선교사들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국내목회자들이 세워진 후에도 2중구도가 지속되었다. 그 당시 목회자와 가족은 가난과 궁핍을 감수해야 했다. 일제강점기와 공산당 치하에서 교회를 대표하고 교인을 돌보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는 경우가 허다했다. 목회자의 신분으로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얻는 유익이 없던 상황 속에서, 성도들은 십자가 복음에 대한 확신과 복음전파의 사명을 지닌 목회자들을 영적지도자로 존경하고 따랐다.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의 2중구도가 은연중에 현대교회에도 지속되고 있는 듯하다. 단지 이런 구도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지에 대한 객관적인 견해가 분명하게 세워지지 않는 상황으로 인해 불미스런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한편, 신분차이를 수직적으로 관계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목회자라는 직분이 평신도보다 높다거나 평신도는 목회자에게 반드시 종속적이 되어야 한다는 견해이다. 이와 반대로 신약성경 베드로전서 2장 9-10절에 근거하여 모든 성도가 ‘제사장직’을 지녔다고 해석하고, 나아가서 목회자와 평신도가 신분적으로 동일하고 전혀 다를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경우이다. 

여러 방법으로 목회자와 평신도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다. 1960년대 이후 ‘평신도신학’이라는 분야가 크게 발전되기도 하였다. 직분에 대한 신분(being)과 사역(doing)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 매우 가장 효과적이라 생각한다(다음호에서 다룰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자칫 ‘목회자나 평신도’ 사이의 긴장관계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출 때 생기는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매우 크다. 교회에 주신 소중한 사명, 즉 모두 함께 복음전파에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출발시점에 드러난 평신도의 귀한 사역을 살펴보면서, 복음전파 사명완수를 위한 상호협력의 소중함을 각성하는 기회를 가지길 원한다.  

 

특이한 출발 

 

‘성경중심’은 한국교회가 지닌 특징 중 하나이다. 그 출발과 발전과정에서 선교사들은 성도들이 성경을 제대로 읽고 배워 속히 신앙이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 무엇보다 자신들이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넘어야 했다. 동시에 한국어성경을 보급하기 위해 먼저 번역작업에 착수해야 했다. 이와 같이 선교사들이 먼저 언어를 습득한 뒤 성경번역을 시도하는 것은 현재에도 널리 실행되고 있는 선교방법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출발은 특이했다. 서양출신 복음 선교사들이 조선 땅을 밟기도 전에 먼저 외국에서 성경이 번역된 것이다. 

1885년, 최초 복음 선교사였던 호러스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1916)와 헨리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가 함께 조선 땅을 밟았다. 이때 미국인이었던 그들이 1884년에 일본에서 번역된 ‘신양전서 마가복음언해’를 손에 들고 입국할 수 있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더욱 고무적이었던 것은 이에 앞서 이미 중국에서 스코틀랜드선교사였던 존 로스(John Ross, 1842-1915)에 의해 한국어성경이 번역된 것이다. 1882년에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1883년에 사도행전이, 1884년에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이 차례로 번역되었다. 그 결과 최초 한글신약성경인 ‘예수셩교젼서’가 1887년에 출판되었다. 

이와 같이 일본과 중국에서 번역된 성경의 내용은 어떠했을까? 결코 완벽하지 않았다. 단어 선택의 오류, 무리한 문자적 번역, 심지어 번역자의 사투리 표현도 담겨 있다. 그러나 공식 한국어 수업이나 사전도 없던 상황에서 성경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표현하려는  시도가 담겨있다. 향후 1893년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중심으로 공동번역자회가 출범하였고 그 결과 1936년에 구약성경이 1938년에 신약성경이 출판되었다. 

 

선교사들 한국어성경 들고 입국...번역 동참 과정에서 회심

번역자들 국내서 전도사역...백홍준은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

 

 

평신도의 역할

 

이토록 한국교회가 ‘성경중심’으로 출발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으로, 외국선교사들과 협조하였던 한인 평신도의 헌신과 열정을 빼놓을 수 없다. 먼저 일본에서 번역을 시도한 이수정(1842-1886)의 경우를 알아보자. 그는 고종의 허락을 받아 새로운 문물을 접하기 위해 수신사 수행원 자격으로 김옥균과 민영익, 그리고 박영효와 함께 1882년 10월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불신자였던 그는 기독교 신자였던 한 농학박사로부터 성경을 건네받고 그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에 회심하여 결국 1883년 4월에 세례를 받았다. 

기독교인으로 새롭게 태어난 이수정은 조선을 가슴에 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3가지 성과를 소개한다. 첫째는 미국 북장로교회 해외 선교부에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발송하였다. 이수정의 편지로 인해 언더우드를 파송하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두 번째는 한국교회 선교를 위해 성경번역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확신하여 자신이 직접 번역작업을 주도하였다. 일본에 거주하던 미국선교사들이 이수정의 번역에 협조하였고, 성경출판을 위해 미국성서공회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세 번째는 이수정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조선으로 입국하기 전 일본에 머물며 최종 사역준비를 하는 동안 직접 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이수정은 신학을 공부하거나 오래 교회생활의 경험을 하지 않았던 초년생 평신도였다. 그렇지만 그는 조선 복음화를 위해 긴요하게 쓰임을 받은 하나님의 도구였다.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존 로스 선교사와 그의 동료들은 효과적인 한국어 성경번역을 위해 한국인들을 참여시켰다. 1875년에 청년이었던 이응찬과 김진기가 먼저 시작하였고, 그 후 백홍준, 서상륜, 이성하, 김청송 등이 협조하였다. 물론 이들은 기독교의 진리에 대해 무지하던 자들이었으나 번역에 동참하는 과정에 회심하여 선교사들에게 세례를 받았다. 조선 땅에 정식 교회가 세워지기 전 일본의 이수정보다 앞선 시간에 중국 땅에서 배출된 평신도들이 한국교회를 위한 사역에 이바지 한 것이다. 이들의 헌신은 한국교회사의 한 획을 긋는 공헌으로 이어졌다.  

 

자생적 전도인 

 

선교지에 교회가 세워지기 전 선교사들은 초석의 역할자로 동역할 소수의 현지인을 얻는데 주력한다. 십자가 복음을 분명하게 이해할 뿐 아니라 주님의 지상명령을 공유하는 열정적인 신앙인이 세워질 때 선교사역이 효과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 필수적으로 이 시점까지 인내하며 잘 견뎌야 한다.  

한국교회의 시작은 매우 달랐다. 상식과 기대를 뛰어 넘는 일이 발생하였다. 중국에서 선교사들과 함께 성경번역에 협조하였던 이들이 조선 땅에 입국하여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자생적 전도인의 역할이 시작된 것이다.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은 1890년 이후 존 네비우스 선교사가 창안한 선교정책인 3자 원칙, 즉 토착인의 자전, 자립, 그리고 자치를 수용하였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한국인에 의한 한국교회를 세운다는 선교정책을 수용한 것이지만 시간적으로 이보다 훨씬 앞서 이미 한국교회는 자생적 전도인으로 헌신하였던 평신도들에 의해 이 방향으로 실천되었던 것이다. 

로스 선교사의 번역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던 서상륜은 1883년 복음서를 들고 국경을 넘다 불심검문에 걸려 투옥되는 경험을 하였다. 지인의 도움으로 압수당했던 복음서 중 일부를 돌려받은 뒤 고향인 의주에 도착한 뒤 서상륜은 동생 서경조와 함께 황해도 장연군 송천으로 자리를 옮겨 전도사역을 시작했다.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한 결과 몇 달 후 18명의 결신자를 얻게 되었다. 이들은 비밀리에 주일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는데 이렇게 세워진 교회가 바로 한국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소래교회이다. 

이성하는 1883년부터 고향인 의주에 잠입하여 처음에는 구두로 나중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성경을 반입하여 복음을 전했다. 건강상의 이유로 백홍준이 1884년부터 그의 사역을 대신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의주를 중심하였지만 서서히 다른 도시로 전도영역을 넓혀갔다. 그는 이미 한국에서 활동하던 언더우드선교사와 연결이 되어 더욱 힘을 얻었다. 1892년, 백홍준은 국법을 어기고 외국인과 내통하였다는 죄명을 받고 봉천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옥고를 치르던 중에 생을 마치게 되었다. 한인 최초 개신교 순교자의 제물로 자신을 주님께 바친 것이다. 비록 그는 이 세상을 떠났지만 남아있던 성도들을 중심으로 복음이 더욱 왕성하게 전파되었다.  

 

협력 관계 

 

외국선교사들은 평신도 전도인의 활동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언더우드선교사가 1887년 가을에 1차 전도여행길에 올랐을 때, 이미 세례 받을 준비가 되어있던 교인들을 보고 놀랐다. 최초로 세워진 소래교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더욱이 각 곳에서 세례를 받기를 원하는 지원자들을 점검할 때 그들이 기독교의 기본진리에 대해 익히 잘 배워 알고 있었다는 사실로 인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초기 한국교회가 남긴 발자취의 일부를 추적해 보았다. 언제나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에 갈등이 생길 수 있다. 믿음의 선배들은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남겨준 중요한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모두 함께 복음전파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으며,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자리에서 한 마음으로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covenantcho@yahoo.com

05.0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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