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침마다 일어나서 새로운 논란을 찾아서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그런데 때때로 새롭게 생긴 논란이 우리를 쫓아오기도 합니다. 행복을 찾는 방법에 대해 지나치게 자주 이야기하다 보면, 그게 직업병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인기 있는 유튜버이자 연설가인 조던 피터슨을 중심으로 시작된 하나의 토론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X에 메시지를 올렸습니다(나는 아직도 트위터라고 부르는 게 더 익숙합니다). 이 특정 X 메시지는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수백만 건의 조회 수와 3만 건의 ‘좋아요’를 받은 겁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공감을 얻었습니다. 청취자 중 상당수가 “이거, 조던 피터슨 씨, 결론이 너무 성급한 거 아니야?” 하면서 “이건 기독교 희락주의자가 해결해야 할 문제야”라고 나를 태그했기 때문에 나도 그 메시지를 보았습니다. 나는 청취자들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 피터슨이 쓴 내용에 대한 분석을 부탁합니다.
“인생은 고통이다. 인생의 목적은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 고통에도 불구하고 나를 지탱할 무언가를 찾는 것이다”(2024년 11월 12일). 이 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그러니까 숨겨진 맥락 같은 건 아무것도 없다고 할 때, 존 파이퍼 목사님, 당신의 첫 반응은 무엇입니까?
조던 피터슨은 행복을 삶의 목표로 삼는 태도를 부정적으로 바라봅니다. 그에게 행복은 깊고, 지속적이며, 영혼을 만족시키고, 하나님에 뿌리를 두고, 또 사랑으로 확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정의하는 행복은 덧없고, 예측 불가능하고, 충동적이고, 피상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행복이 깊고, 지속적이며, 영혼을 만족시키고, 또 하나님에게 뿌리를 둔 게 아니라 단지 덧없고, 피상적이며, 예측 불가능하고, 충동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그의 진단은 옳습니다.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 행복이라고 부르는, 영혼에 결코 깊은 만족을 줄 수 없는 무언가를 쫓는 절망에서부터 사람들을 구출하자는 것입니다. 그는 실현 불가능한 그 무엇을 행복이라고 부릅니다. 그 누구도 그가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결코 깊은 만족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건 너무나도 피상적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접근 방식은 행복이라는 단어를 삶에서 구속이 가능한 하나의 목표로서 보는 게 아니라, 단지 의미성이라는 개념으로 대체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의 목적은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삶이 고통스럽다는 사실이 더 이상 문제가 안 될 정도로 의미 있는 존재 방식을 찾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이 피상적이고 덧없고 또 예측할 수 없다는 그의 견해와 더불어서 의미성이라는 단어에 부여하는 잠재적으로 긍정적인 내용을 감안할 때, 나는 기본적으로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부르건 다른 무엇이라고 부르건, 덧없고 예측할 수 없고 충동적이고 피상적인 공허함을 추구하며 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깊은 차원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정말로 나는 그렇습니다. 아멘.
다른 접근
지난 50년 동안 나는 피터슨과는 다른 전략을 추구해 왔습니다. 나는 사람들을 덧없고 예측 불가능하고 충동적이고 피상적이며 (덧붙여 말하자면) 하나님을 모독하고 그리스도를 폄하하고 성경을 무시하고 저주하는 방식에 근거를 둔 행복 추구에서 구출하고자 했습니다. 내가 추구해 온 접근 방식은 적어도 세 가지 면에서 피터슨의 접근 방식과 다릅니다.
첫째, 나는 삶의 목표로서 행복이라는 단어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행복이 깊고 지속적이며 영혼을 만족시키고 하나님에 뿌리를 두고 또 사랑으로 확장되는 대상으로 구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 단어가 역사적으로 사용된 방식은 단지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지 않습니다. 매우 깊고 풍부합니다. 그렇기에 행복을 제대로 사용할 때 그 단어가 반드시 공허함과 무익함을 의미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둘째, 나는 의미성이라는 단어와 개념이 행복이라는 단어만큼이나 공허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의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악한 사람들이 찾아내는 의미를 내포하는 최악의 공포로 채워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좋은 사람들이 찾는 의미의 아름다운 것들로도 채워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지 의미라는 개념 자체가 삶에 대한 명확한 지침을 제공하는 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세 번째는 이것입니다. 사람들을 덧없고 피상적이고 공허한 행복에서 구출하기 위한 내 전략은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에 둔 성경의 권위에 의해 지배됩니다. 그렇기에 지난 50년 동안 나의 사역은 단순히 성경이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신 목적과 그것이 인간 삶의 목적에 대해서 무엇을 알려주는가를 바로 이해하고 반복해서 가르친 것입니다.
진짜 목표: 진짜 행복
내가 찾은 건 다음 다섯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전하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시 19:1; 사 43:7). 즉, 하나님은 자신의 위대함과 아름다움과 가치를 보여주고 공유하기 위해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이 창조세계는 하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주는 위대함과 아름다움과 가치로 넘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도 그렇기에,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만민들에게 보여주고 또 전하고자 하십니다.
둘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창 1:27).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 위대함과 아름다움과 가치를 반영하고 확대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그것이 이미지의 목적입니다. 이미지는 그 자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하나님과 우리 서로에게 반영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셋째, 아무도 원래의 목적에 맞게 움직이지 않았기에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습니다(롬 5:10). 우리는 하나님의 가치를 확대하기 위해 살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 자신의 가치를 확대하기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름다움에는 단지 공의(벌하는 것)만 있는 게 아니라 자비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그를 신뢰하는 모든 사람의 벌을 대신 지게 하셨습니다(갈 3:13). 그래서 믿음이 생기면, 인간의 영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그와 세상에 하나님의 위대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가치를 반영하려는 열정이 다시 일어납니다(고전 6:20; 10:31).
넷째, 나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 안에서 지극히 행복하고, 하나님 안에서 지극히 만족하고, 하나님 안에서 지극히 자족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그가 지극히 귀중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이 점은 특히 우리가 고통 받을 때 더 진리입니다. 우리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 안에서 행복과 만족, 기쁨과 즐거움을 유지한다면 그가 실로 귀중하고 건강보다 더 가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도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깊고 흔들리지 않는 행복을 유지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분을 실제 있는 그대로 소중하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빌 1:20-23).
마지막 다섯 번째로,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여러분이 기대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특히 고통 중에서도 우리가 그분으로만 만족한다면, 하나님은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목표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면, 우리는 내 삶의 목표를 하나님 안에서, 특히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 안에서 지극히 만족하는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피터슨이 말했듯이, 삶은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행복, 기쁨, 즐거움은 그리스도인에게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반복적으로 “주 안에서 즐거워하라”(시 37:4), “주 안에서 기뻐하라”(시 32:11), “항상 주 안에서 기뻐하라”(빌 4:4)고 명령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 그의 말은 정말 놀랍습니다) “모든 환난 가운데서” 즉, 우리가 만나는 모든 고난 가운데서 “나는 하나님 안에서 기쁨으로 넘쳐흐릅니다”라고 말합니다(고후 7:4). 그렇기에 모든 것의 끝과 목표는 언제나 하나님 안에서 그의 백성이 누리는 기쁨 속에 반영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시편 기자가 말했듯이, “당신 앞에는 기쁨이 가득하고 당신의 오른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시 16:11). 그분을 즐기는 것은 더 큰 무언가를 추구할 때 떨어지는 부산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위대함의 본질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예배의 본질입니다.
by John Piper, TGC
04.19.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