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무서운 책의 마지막 장을 조금 전 덮었다. 서스펜스나 호러 소설이 아니다. 허구가 아니다. 적어도 아직은 아니지만, 언제 사실이 될지 모른다.
애니 제이콥슨의 24분(Nuclear War)은 단지 추측에 근거한 글이 아니어서 무섭다. 최고위 관리들과의 인터뷰와 기밀 해제된 문서를 바탕으로, 저자는 미국에 핵 공격이 가해질 경우 민간인과 군인 모두에게 닥칠 일을 끔찍하다고 말해도 될 정도로 자세히 설명한다. 하지만 단지 사망자 숫자 때문에 핵이 무서운 게 아니다. 진짜 공포는 연쇄적으로 따라오는 결과이다. 우리가 아는 문명은 순식간에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붕괴될 것이다.
소위 말하는 이 세계의 시스템이 얼마나 취약한지는 실로 놀라울 정도이다. 우리는 일상을 당연하게 여긴다. 통신 네트워크, 금융 시장, 공급망, 현대 생활의 기본 인프라 등등. 하지만 제이콥슨은 이 모든 게 얼마나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한 번의 폭발은 단지 하나의 고립된 사건으로 남지 않는다. 억지력이라는 말 속에 내재된 논리로 인해서, 자기 방어를 위한 충동과 신속한 보복의 필요성은 핵전쟁 발발을 단 한 번의 치명적인 폭발로 그칠 가능성을 현저하게 낮춘다. 첫 번째 미사일이 발사되는 순간, 수많은 핵미사일이 그 뒤를 따를 것이다. 미국 영토에서 첫 번째 폭발이 채 발생하기 전에 이미 반격하는 미사일이 날아가고 있을 것이다. 편집증, 의사소통 오류, 그리고 불신으로 인해 치명적인 연쇄작용이 작동을 시작한다.
차마 그런 시나리오를 상상할 수 없다면, 1차 세계대전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생각해 보라. 1914년 여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라. 몇 번의 트리거, 외교적 실수, 세계 지도자들을 전쟁 속으로 밀어 넣은 도미노 현상, 전쟁을 어떻게 막아야 할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결과 유럽의 젊은 세대 전체가 파괴되었다. 꼭 죽고 싶어 환장한 놈이 있어야 전쟁이 발발하는 게 아니다. 핵 버튼에 손가락을 얹은 누군가의 순간적인 실수, 그거 하나면 충분하다.
단 몇 시간에 세계가 파괴된다
24분에서 내가 주목한 건 재앙의 속도였다. 이 책을 읽는 데 걸린 시간이 핵전쟁 전체 시나리오가 전개되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10배는 더 길다. 일반적인 두 시간짜리 영화를 보는 데 걸리는 시간의 절반 만에 세상은 영원히 바뀔 것이다.
이런 식의 타임라인은 인류가 여태 경험한 적이 없는 속도이다. 다른 전쟁은 수년, 심지어 수십 년에 걸쳐서 이어졌다. 하지만 이번 전쟁은 단 몇 분 안에 끝날 것이다. 심의할 시간도, 전략적 계획을 세울 시간도, 긴장 완화를 위한 마지막 순간의 노력도 없을 것이다. 일단 연쇄 반응이 시작되면 멈추는 건 불가능하다. 단 한 시간 안에 여러 대륙의 주요 도시는 타오르는 분화구로 전락하고, 방사능이 온 시골을 휩쓸 것이다. 베수비오 산과 폼페이를 생각하면 된다. 차이가 있다면, 온 세상이 폼페이가 된다는 사실이다. 모든 정부가 무너질 것이다. 통신이 중단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아는 지금 이 세상은 사라진다.
핵 교환은 단지 또 하나의 전쟁이 아니라 인류 멸종 사건이다. 1970년대 민방위 훈련으로 학생들이 책상 밑으로 들어가던 건 우스꽝스러운 짓이다. 수백만의 민간인, 가족, 어린이, 전체 인구가 순식간에 소각될 것이다. 그럼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들이야말로 불운한 사람들이다. 이어지는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죽어갈 것이다. 또는 도무지 알아볼 수 없는 세상, 방사능과 폐허가 남긴 황량한 종말을 만날 것이다. 상황은 아마도 코맥 매카시의 소설 더 로더(The Road)를 영화화한 동명의 공포 영화와 비슷하지 않을까?
상실의 측면에서 보는 사랑
나는 이 책이 무섭다고 말했고, 사실 그렇다. 그토록 무섭고 또 그럴듯한 시나리오 때문에 느끼는 저변에 흐르는 스트레스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또 다른 감정이 떠오른다. 바로 감사이다. 이 세상이 얼마나 빨리 사라질 수 있는지를 생각할수록 세상을 더 사랑하게 된다. 체스터턴의 말이 떠오른다. “무엇이든 제대로 사랑하는 방법은 그것이 언제라도 사라질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다 작은 규모로 이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비극적인 사고를 당한 다른 누군가의 아이에 관한 소식을 들었을 때 느끼는 창자가 뒤틀리는 것 같은 극심한 통증, 그리고 이어서 솟구치는 내 아이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꼭 껴안고 싶다는 본능 말이다. 인생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깨달을 때 인생은 결코 덜 소중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더 소중해진다.
체스터턴은 Saint Francis of Assisi(아시시의 성 프란시스코)에서 사랑하는 마을이 거꾸로 뒤집히는 상황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각을 묘사한다. “일반적인 눈으로 보면 성벽의 큰 석조나 망루의 거대한 기초, 그리고 높은 성채가 동네를 더 안전하고 영구적으로 만드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 모두를 뒤집는 순간 같은 무게로 인해 마을은 더 무력하고 더 위험해진다.” 이상한 역설이다. 재앙에 직면한 세상을 한번 보자. 우리를 보호한다고 믿던 모든 시스템과 구조가 순식간에 엄청난 취약성으로 바뀌어버린다. 그렇다고 달랑 실 한 가닥에 매달린 세상을 보는 게 반드시 절망으로만 이어지지는 않는다. 사랑으로 이어진다. 기쁨으로, 봉사로도 이어진다.
실에 매달린 세상
이런 느낌의 사랑은 훨씬 더 깊은 무언가, 즉 의존성과 연결되어 있다. 체스터턴은 어떻게 성 프란시스코가 새로운 관점에서 세상을 본 후 세상을 더 사랑했다고 하는지를 설명한다.
그의 눈에 비친 가파른 지붕 위의 기와, 성벽에 앉은 새는 여전히 사랑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이제 영원한 위험과 의존이라는 새롭고 신성한 빛이 깃들어져 있다. 그는 과거와는 다른 눈으로 보고 사랑한다. 움직일 수 없는 강한 도시를 보며 느끼던 자랑스러움 대신에 그는 이제 무너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 전능한 하나님께 감사한다. 거대한 크리스탈이 산산이 부서져 사방에 뿌려지듯 온 우주의 별들이 우리 위로 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 성 베드로가 머리를 아래로 향한 채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보았던 세상도 아마 그렇지 않았을까?
이것이 핵전쟁을 생각하면서 내가 느낀 감정이다. 두려움이 전부가 아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자비에 얼마나 의존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내 삶 자체가 하나님의 뜻에 얼마나 의존하는지. 대량 멸종의 위협은 확대된 개인의 취약성이다. 누구라도 사고나 뇌졸중으로 죽을 수 있다. 항상 말이다. 한 순간 살아 있다가 바로 다음 순간에 죽는 게 인간이다. 인간의 모든 삶은 언제나 실에 매달려 있고, 그 실을 잡고 있는 분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는 분이다. 역사는 공포로 가득하다. 인간의 사악함과 고통은 때때로 통제되지 않은 채 흘러갔다. 수세기 전에 있었던 수십 년 동안의 전쟁, 아우슈비츠의 공포, 체르노빌의 방사능 오염이 그렇다. 하지만 동시에 역사는 알려지지 않은 구원으로도 가득하다. 일어나지 않은 전쟁, 일어나지 않은 재난, 간신히 피했던 잔혹 행위가 그렇다. 이 모든 순간을 우리가 다 보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라는 구조에 짜여서 역사 속에서 일어난다.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다음 재앙이 얼마나 가까이 왔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하게 아는 게 있다. 모든 것을 지탱하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지금도 우리가 헤아릴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악을 억제하고 계신다. 그 누구도 매일 숨을 쉴 자격이 없음에도 그는 우리가 계속 숨을 쉬도록 허락하신다. 그리고 그는 약속하셨다. 가장 어두운 순간에조차도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낼 것이라고 말이다.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제이콥슨의 책이 경고와 억제책의 역할을 할지 말이다. 지도자들이 어둠 속 터널로 빠지는 것을 막는 하나님의 섭리로 쓰일 또 하나의 도구가 될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책은 우리가 세상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보도록 돕는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향한 의존감을 키우며, 체스터턴이 말했듯이 파괴되는 세상에서도 영광에 대한 비전을 보도록 돕는다.
하나님 자비의 머리카락에 온 세상이 매달려 있음을 본 사람은 진실을 본 것이다. 차가운 진실이라고 불러도 틀린 말이 아니다. 거꾸로 뒤집혀진 도시를 본 사람이야말로 도시를 제대로 본 것이다.
by Trevin Wax, TGC
03.01.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