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1998년)에 나온 공상액션 영화로 ‘솔저’(soldier)가 있습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한 미래사회에서의 전쟁은 태어나면서부터 전쟁에 특수화되도록 유전적으로 개조된 군인들에 의해서 이뤄집니다. 이들 군인들은 철저하게 경쟁에서 이겨야만 생존할 수 있는 사회조직에서 태어나고 성장합니다. 이들은 같은 훈련병끼리의 경쟁에서 지게되면 가차없이 우주쓰레기장으로 버려지게 됩니다. 이런 처절한 생존경쟁 제도 속에서 살아남았던 병사에게 군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질문하자 그가 내뱉은 말은 “두려움과 훈련”(Fear and Discipline)입니다. 살아남기 위해 더 강도높은 훈련을 해야할 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자신보다 더 뛰어난 군인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 항상 ‘두려움’ 속에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단 두 단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두려움과 훈련’이 되어 보입니다. 한국에서는 정치영역에서 생존하기 위해 생명을 건 갈등과 투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갈등과 투쟁의 중심에는 더 이상 진리도 국민도 보이지 않고 오직 어떻게 해야 상대를 누르고 권력투쟁에서 최후 승자가 될까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곳 미국은 어떻습니까? 별로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새로 시작될 정부의 효율성을 평가할 ‘정부효율부’(Department of Government Efficiency)의 중심가치를 눈여겨 봅니다. 수학 올림피아드 챔피언보다 프롬퀸을, 졸업식의 최우수성적을 거둔 학생보다 운동선수를 칭찬하는 문화에선 최고의 엔지니어가 탄생하지 못한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평범성이 미국교육의 중심가치가 되어서는 국제경쟁에서 이길 수 없기 때문에 경쟁으로 똘똘하게 키워진 미국 기술자들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시대 추세 가운데서 우리 자신들을 돌아봅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승리한 사람들을 키워내는 것이 우리 사회의 중심가치가 될 때 그 사회는 절대로 양보나 협력을 통한 따뜻함과 다수가 쉼을 얻는 사회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약자들을 챙겨주고 뒤쳐진 사람들의 손을 잡고 함께 뛰어가는 그런 사회는 승자독식의 경쟁사회를 통해서는 결코 만들어질 수도, 생존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숫자화된 점수표, 곧 학업성적과 연봉금액과 소유자산액수에 의해 인간의 능력과 존귀함이 결정되는 매정한 사회를 향해 효율성이 좋다는 이유로 우리 스스로 걸어가고 있지 않는지 고민해 봅니다. 그런데 이런 흐름에서 그 어떤 나라도 비껴갈 수가 없어 보입니다. 이 흐름을 거부하는 어떤 국가라도 국제경쟁에서 밀려날 것이며, 그 결과 기술과 생존경쟁에서 패배자로 추락하여 중류 혹은 하류 국가로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조용히 ‘이런 거대한 흐름의 밑바탕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바로 인간의 ‘죄성’임을 직관적으로 보게 됩니다. 타락된 죄성이 경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합리적으로 약자들을 더 비참하게 만듭니다.
이런 어두운 시대에도 여전히 약자들을 챙기어 자신의 걸음을 뒤에서 걸으시는 주 예수님의 손과 발을 봅니다!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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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1.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