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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신학자가 되고 싶은가? 먼저 바보가 되라!

나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더 나은 신학자가 되기 위하여

나는 타임(Time)이 선정한 현존하는 사상가 쉰 명 중 한 사람을 아는 행운아다. 그는 이십 년 넘게 나의 멘토다. 그는 또는 풋볼 팀 캔자스 치프스의 열렬한 팬이기도 하다. 그는 내가 깊은 의심의 계절을 지나는 중에는 현자로서, 그리고 심각한 불안의 발작을 일으킬 때에는 친구로서 내 곁에 있어 주었다. 그의 이름은 J. P. 모어랜드이고, 그는 나를 바보라고 생각한다. 

그가 나를 바보라고 생각한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가 정기적으로 알려주기 때문이다. 바이올라 대학교의 탈봇 신학 대학에 있는 우리 두 사람의 사무실은 10미터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우리는 수시로 만난다. 타임이 선정한 것은 사상가가 아니라 사실상 현존하는 무감각한 멍청이 쉰 명이고 J. P.가 거기에 속한다는 결론을 내리기 전에, 먼저 그가 정기적으로 나를 바보라고 상기시키는 게 왜 내게 축복인지 말해야겠다. 그 이유는 바로 G. K. 체스터턴이 했던 이 말에 다 들어있다. “천사는 자신을 가볍게 여기기에 날 수 있다. ... 하지만 자신을 대단하게 여기는 사탄은 아래로부터 끌어당기는 힘에 의해 타락했다.”

더 나은 신학자가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나 자신을 덜 진지하게 여겨야 한다. 대신에 하나님을 심각하고 진지하게 여겨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관해서는, 우리 모두가 바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나의 어리석음을 깨닫기

 

신학자에 대한 좋은 정의 중 하나가 이것이다. 하나님의 가장 깊은 부분에 대해서 자신이 얼마나 철저하게 바보인지를 깨닫고 어리석음을 할 수 있는 데까지 줄이기 위해서라고 최대한 자주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그 어리석음을 가지고 오는 사람. (어쩌면 신학 컨퍼런스는 바보 컨벤션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놀랍게도 겨우 스무 살에 했던 설교에서 찰스 스펄전이 바로 이 점을 언급했다. “신학은 너무나 광대해서 우리의 모든 생각이 그 광대함에 묻혀 버립니다. 너무나 깊어서 우리의 자존심이 그 무한함에 빠져 버립니다. ... 그 어떤 주제로 묵상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에 대한 생각만큼 마음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연구는 그 주제가 지닌 엄청난 크기와 무한성이라는 측면으로 인해서 독특함을 가진다. 

교만함을 미덕으로 뻔뻔스럽게 마케팅하는 시대에 간절히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차마 인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무한히 흥미롭고, 선하고, 강력하고, 정의롭고, 지혜롭고, 영광스러운 존재를 숙고함으로써 교만함이 산산이 조각나버린 하나님의 사람이다. 신학자라면 “겸손과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연구하는 엄숙한 과제에 접근해야 한다. 하나님은 낮은 자를 좋아하시지만, 교만하고 자만심이 강한 사람에게는 자신을 숨기신다”라는 찰스 옥타비우스 부스의 경고를 상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을 바보라고 묘사한 사람(고전 4:10)의 조언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는 “약함과 모욕에도 만족한다”(고후 12:10)고 말한 신학자이자 사도였던 바울이다. 그는 “자신의 눈에 결코 지혜롭지 말라”(롬 12:16)고 말했다. 훌륭한 신학자라면 영원의 저편에 서 있는 우리가 보는 것은 고작해야 “거울로 희미하게 보는”(고전 13:12) 수준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 정도의 겸손은 가지고 있다. 헤르만 바빙크가 말한 대로 “무한하고 헤아릴 수 없는 본질의 바다”가 하나님이라면, 신학자가 제공하는 것은 고작해야 그 무한한 바다에서 떨어지는 단지 한 방울의 물에 불과하다. 그 한 방울이 아무리 소중하고, 영혼을 적셔 주고, 또 생명을 준다고 해도 한 방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더 나은 신학자가 되기 위한 세 가지 팁이 있다.

 

 1.  당신의 모든 단점까지 아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모임을 만들라.

 

당신의 지나친 진지함(self-seriousness)을 꿰뚫어 보는 사람, 그리고 사랑으로 또 유머러스하게 그 사실을 이야기해 주는 사람을 주변에 두어야 한다. “사랑으로”라는 단어에 주목하라. 나는 지금 하나님을 나 자신보다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기쁨에 뿌리를 두기는커녕, 허무주의 및 충돌하는 자존심을 더 중시하는 비성경적인 저속한 농담과 폄하를 장려하는 게 아니다.  J. P.가 한번은 막 설교를 하고 내려온 친구에게 “설교 아주 좋았어!” 하고 칭찬을 했던 일화를 들려주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매우 경건하게 “아, 다 하나님이 하신 거지” 하고 대답했다. 거기에 J. P.가 뭐라고 대답했을까? “그래? 진짜 하나님이 설교하셨다면, 자네 설교보다는 훨씬 더 좋았을 텐데 말이야.”

 

 2. 루터, 스펄전, 에드워즈, 쉐퍼(또는 여기에 당신이 좋아하는 신학자를 넣으라)를 계승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시도를 포기하라.

 

위대한 신학자는 결코 유명인을 꿈꾸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크게 만들기 위해 출발했다. 진짜 가장 중요한 것, 즉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다 보면, 대부분은 그렇지 않겠지만, 혹시 아는가? 당신을 바라보는 사람들로부터 조금의 영광은 얻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영광을 먼저 추구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놓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영광이 먼지로 변하는 것을 볼 것이다. 유명인을 최고로 치는 오늘날 문화에서 급진적으로 반문화적인 사람이 되라. 그리고 유명해지고 싶은 갈망(옛 성경에서 “허영심”이라고 부름)을 당장 십자가로 가져가라.

 

3. 매일 자신에게 반자존심 복음을 전파하라.

 

이사야는 자신의 “의로운 행위”를 히브리어로 “생리혈 닦는 걸레”를 의미하는 idim bagad(사 64:6)에 비유했다. 바울은 자신의 의로움을 “쓰레기, 폐기물, 대변”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skybala”로 묘사했다(빌 3:8). 루터는 자신의 종교성을 “악취 나는 거름”을 의미하는 독일어 “reiffe dreck”로 묘사했다.

그러나 이사야는 동시에 “우리의 허물로 인해 찔리고”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짓밟힌”(사 53:5) 고난 받는 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기대했다. 바울은 예수님을 보내심으로 “의롭고 의롭게 하는 자”(롬 3:26)가 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루터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 그 하나님 안에서 분노나 무례함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아버지 같은 친절한 마음을 바라보았다.”

훌륭한 신학자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기에 결코 “내 소망은 나의 영적 또는 지적 성과, 그리스어 동사를 분석하는 능력, 또는 내 사무실 앞에서 기다리는 나를 숭상하는 신도들 주위에서 성경해석의 화려한 묘기를 보여주는 능력에 기반을 두고 있다”라는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오래된 찬송가처럼, 우리가 부르는 찬양은 이것이다. “이 몸의 소망 무언가 …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항상 이 찬양을 부르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by Thaddeus Williams, TGC

12.07.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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