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적이다’란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나는 데이비드 웰스의 정의가 지금까지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생각한다. “세속성은 죄를 정상으로 보이게 하고 도리어 의로움을 이상한 것으로 만드는 모든 것이다.” 웰스가 특히 강조하는 건 세속성의 해악성과 만연함이다. 죄에 너무 익숙해지면 죄가 아예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항상 이렇게 물어야 한다. 오늘날에는 어떤 죄가 정상으로 보일까? 너무나도 흔해서 죄라고 생각하기에도 민망한 건 뭐가 있을까?
디지털 시대에 사는 지금 이 질문을 더 많이 생각하면 할수록, 한 가지 결론이 나온다. 우리는 중상모략이 정상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중상모략이란 무엇인가?
중상모략은 타인에 대한 허위사실을 퍼뜨려 그 사람의 평판을 손상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허위사실은 때때로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기 위해 고안된 노골적인 거짓말이지만, 중상모략은 종종 기만적인 추론의 형태를 띤다. 그래서 타인에 관해서 최선이 아닌 최악을 가정하거나, 쓰기 편하게 편집된 몇몇 내용을 근거로 원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하나님은 중상모략을 미워하신다(잠언 6:16, 19). 왜냐하면 그분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서 사탄은 중상모략을 좋아하는데, 그가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존 블룸은 “중상모략의 독한 힘”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것은 사탄의 주요 전략 중 하나로 관계를 분열시키고 교회의 사명을 방해하고 탈선시키기 위한 것이다. 사탄은 중상모략이 교회를 죽이고 분열시키고, 우정을 독살하고, 가족을 파괴한다는 것을 잘 안다. 사탄은 중상모략이 성령의 불을 끄고, 사랑을 죽이고, 영적 쇄신을 단락시키고, 신뢰를 훼손하고, 성도들의 용기를 빨아들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중상모략에 대한 해독제는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에서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는 아홉 번째 계명을 지키라는 설명에서 찾을 수 있다. 충실한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이 행동할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실을 보존하고 증진하고, 이웃과 내 자신의 좋은 이름을 보존하고 증진하고 … 이웃에 대한 자선적인 존경심, 그들의 좋은 이름을 사랑하고, 원하고, 기뻐하고 또 그들의 허약함을 슬퍼하고 감싸주는 것. 그들의 은사와 은혜를 기꺼이 인정하고, 그들의 무죄함을 옹호하고 그들에 대한 좋은 소문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나쁜 소문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 그런데 우리는 종종 중상모략을 즐기는 성향을 보인다. 청교도 작가 토마스 맨튼은 중상모략의 근원이 자기애와 칭찬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라고 믿었다. 중상모략자는 훌륭한 평판을 가진 사람을 경멸한다. “그들은 재능을 가진 자들을 비난으로 공격한다. 그들의 실패를 더 악화시킨다. 편견으로 그들에게 더 짐을 지운다. 그리고 그들의 명성이 무너진 경우에 그 잔재물 위에 자기 자신을 높이는 구조물을 세운다.” 중상모략과 비난은 항상 함께하며 밖으로 폭발하기 마련이다. 결코 자신을 향한 내면의 성찰이란 있을 수 없다. “자기애자는 항상 냉혹한 비난자이다. 자신의 잘못에는 한없이 관대한 그들은 불타는 열정을 타인을 향한 비난으로 쏟아내지 않고는 배기지 못한다.”
중상모략자의 독성에 찌든 효과
매튜 리 앤더슨은 영혼을 빨아들이는 중상모략의 본질을 소비의 관점에서 묘사한 신약을 근거로 설명한다. 갈라디아서 5:15은 “서로 물고 삼키는” 경향에 대해 경고하는데, 이는 “창과 화살”과 같은 이빨과 “날카로운 칼”과 같은 혀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시편 기자의 말을 반영한다(시 57:4). 앤더슨은 또한 중세의 한 문헌을 인용하는데, 거기에서 한 여자를 묘사하면서 “하나님이 그녀에게 베푸신 회개, 헌신, 연민의 은혜 때문에 사람들이 그녀를 중상모략하고, 갉아먹고, 좀 먹었다”라고 썼다.
중상모략과 명예훼손은 피해자의 행동 범위를 제한한다. 피해자의 대응을 제한하고 도리어 사회 주변부로 밀어낸다. 그 정도로 중상모략과 명예훼손은 피해자에게 일종의 빈곤을 강요하는데 그건, 그것들이 애초에 번영에 필요한 사회적 조건을 제거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좋은 이름”을 벗겨내는 중상모략, 폄하, 명예 훼손은 피해자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정체성을 비우고 그로 하여금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한 내적 자원에만 전전긍긍하도록 축소시킨다. 중상모략의 주된 목적이 물질인 것은 아니지만, 그건 사실상 “밥그릇”을 앗아갈 수도 있다. 즉, 상대로 하여금 먹고 살 방도를 찾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말로 서로를 “잡아먹는다”라는 표현은 참으로 적절하다.
소셜미디어로 인해서 중상모략이 쉬워졌을 뿐 아니라 그 증폭의 길도 훤하게 닦였다. 속도와 빠른 반응을 강조하는 소셜미디어에서는 종종 우연한 중상모략이 조장된다.
애초에 중상모략을 할 의도가 있었던 사람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단순히 자기 지식을 자랑하려고 대화에 끼어들었다가 결국에는 자신도 모르게 중상모략에 가담하기도 한다. 중상모략이 널리 퍼지는 이유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소셜미디어 알고리즘은 비방하는 사람을 선호한다. 그들의 노출(profile)을 높이고 고발자와 피해자가 사람들로부터 더 많은 관심을 끌도록 유도한다. 제도가 쇠퇴하는 시대에 소셜미디어는 뭔가 공통점을 찾거나 함께 어울리려는 노력에서 사람들을 벗어나도록 유도한다. 대신에 그 자리에 들어선 새로운 목표는 누군가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만약에 2,30년 전 교회 지도자들이 지금 세상에 떨어져서 소셜미디어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본다면, 만연한 중상모략의 현실 앞에서 충격을 받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 죄를 용납하는 사람들과 너무도 쉽게 거기에 가담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은 말문이 막힐 것이다. 중상모략이라는 활동이 특히 무서운 것은 그게 우리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세상과 맺는 중상모략, 그리고 우정
우리 시대의 이상한 아이러니 중 하나는 진리 앞에서 확고한 입장을 취하고, 성경적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 가치에 반대하며, 또 세상과 야합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조차도 중상모략이 만연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친절하게” “귀엽게” 또는 “듣기 좋게” 하더라도 중상모략은 중상모략이다.) 그들은 야고보서 4:4,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를 인용하여 “세상과 벗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적대감임을 알지 못하느냐?” 라고 말한다. 하나님 편에 서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법은 세상에 대한 적대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건 다름 아니라 가족, 교회, 사회 전반에 해를 끼친 이념에 맞서거나, 성적 부도덕과 음란물의 도덕적 늪과 대중문화의 얕은 매력에 맞서는 것이다.
거룩함에 대한 선하고 경건한 욕망에서 비롯된 이러한 충동은 세상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내뱉은 죄악의 말을 변명하거나 최소화하는 데에 아주 효과적인 구실로 활용된다. 사실상 야고보서의 맥락에 더 합당한, 세속성이 가져다준 더 미묘한 형태에 대한 경고를 놓친 결과이다. 야고보는 그리스도인과 기독교를 적대하는 입장에 대한 부드럽거나 지나치게 수용적인 자세를 “세상과의 우정”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야고보에게 “세상과의 우정”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의 징조는 오히려 “우리들 사이의 전쟁과 싸움”이다. 그 결과 그런 몰락을 갈등으로까지 몰고 가는 “정욕”과 “잘못된 동기”이다.
게다가 세속성에 대한 야고보의 경고는 숲을 불태울 수 있는 힘을 가진 혀를 길들이라는 훈계 바로 뒤에 나온다(약 3장). 그리고 그 경고 바로 뒤에 이 명령이 나온다. “형제자매들아, 서로 비난하지 말라. 동료 신자를 모욕하거나 판단하는 자는 율법을 모욕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다”(4:11). 따라서 문맥상 세상과의 우정이 초래하는 결과는 “무질서”로까지 이어지는 “심한 시기와 이기심”이다(3:14, 16).
중상모략의 확산을 저항하라
소셜미디어에서 중상모략은 이제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그 결과 심지어 중상모략이라고 해도 그것이 내가 추구하는 대의를 돕거나 내 이야기를 확증하는 한, 우리는 쉽게 중상모략이 초래하는 해로운 효과를 간과하기도 한다.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제거해야 할 죄를 보지 않는다. 더 이상 죄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사실상 우리는 지금 이런 형태의 세속성을 정상이라고 느끼고 있다. 그 결과 야고보가 묘사한 의로움(“평화를 사랑하고, 온유하고 … 자비로 가득함”)이 이제 부드러움, 연약함, 그리고 타협으로 재구성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역학 관계는 우리를 두렵게 한다. 소셜 미디어는 중상모략을 정상적으로 보이게 하고, 의로움을 이상하게 보이게 한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우리 중에서 중상모략의 확산을 막는 데 필요한 인내심을 가진 사람, 타인의 망가진 명예를 등에 업고 나의 대의 증진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 중상모략을 당한 상처가 원한으로 변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는 사람을 찾는 것은 매우 어려운 현실이 되었다. 모든 주변 상황은 도리어 우리를 어둠의 행위로 용솟음치는 소용돌이로 끌어당긴다.
여기에 대한 확실한 어떤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나는 깨끗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단지 회개하며 이런 형태의 세속성에 눈을 뜨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간구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도 첫 번째 단계는 속도를 늦추고 진실성이 의심스러울 경우 어떠한 진술이나 비난도 아예 퍼뜨리지 않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야고보가 말했듯이 평화를 뿌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숲을 불태우는 혀가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한 모든 사람에게 머무는 불의 혀가 되어야 한다. 대의가 주는 정당성에 눈이 멀어 우리가 사탄이 되는 일이 없도록, 세속성의 충동을 이겨내도록 하나님이 은혜주시기를 바란다.
by Trevin Wax, TGC
10.26.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