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트콤 치어스(Cheers) 테마곡이 묘사하는 “모두가 당신의 이름을 아는 곳”에, 어떤 집단(tribe)에 소속되는 것, 나만의 특정한 장소를 만드는 것에는 인간적 매력이 있다. 중학교에서 “절친”을 만들든, 대학교에서 동창이나 친목회에 가입하든, Cross Fit 체육관에 등록을 하든, 정치적 심복들을 모으든 관계없이, 특정 집단에 소속되는 건 우리 모두가 가진 갈망이다.
교회라고 다르지 않다. 많은 복음주의자 신도들은 파이퍼, 켈러, 데버, 맥아더 또는 드영과 같은 주요 지도자들과 관련된 집단에 소속하고 싶어 한다. 신학적 집단에는 종종 ‘복음 중심’ 또는 ‘개혁’ 같은 신앙고백 딱지가 붙기도 한다. 그리고 정치적 감정과 겹쳐서 보수파 또는 진보파와 같은 별명을 사용하는 교인들도 적지 않다.
명확한 경계를 가진 특정 집단에 속하고 싶은 갈망은 건강한 걸까 아니면 죄악일까? 집단에 대한 욕망이 틀린 게 아니라고 하더라고, 우리는 왜 항상 ‘우리 대 그들’이라는 뿌리 깊은 집단 사고방식으로 쉽게 타락하는 걸까? 집단에 대한 건강한 갈망에 대해서 말하는 성경은 거기에 잠재된 고유한 위험에 대한 경고도 빠뜨리지 않는다. 두 가지를 다 살펴보겠다.
본향을 향한 갈망
나는 집단에 소속되고 싶은 소망이 본향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한다고 믿는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만드신 장소에서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고자 하는 소망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가 살기에 완벽한 장소로 에덴동산을 만드셨지만, 우리의 첫 조상이 금지된 나무 열매를 먹었을 때 그 본향은 바로 깨어졌다. 즉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그 이후로 인류는 예전과 같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서로와의 관계, 심지어 땅과의 관계에서조차 깨어짐과 분열을 경험한다(창 3:14-16).
죄 없는 우리의 구주는 아버지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이 땅에서 사셨고 종종 더 깊은 교제를 위해서 외딴 곳으로 가셨지만(막 1:35), 그런 예수님조차도 인간관계와 깨어진 세상에 미치는 심각한 죄의 영향력을 경험하셨다. 그는 결코 아름답게 가꾸어진 동산에 거하지 않으셨다. 도리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느니라” 하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마 8:20). 그는 또한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선지자의 현실도 현명하게 인식하셨다(마 13:57; 막 6:4; 눅 4:24; 요4:44).
나는 하늘나라에서 우리를 위한 장소를 준비한다는 예수님의 약속이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다 이런 일반적인 인간적 경험 때문이라고 믿는다(요 14:1-3). 이 세상에서 교회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경험할 행복을 미리 맛보는 곳이다. 따라서 지금은 교회가 믿는 이들이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집단이다. 그럼에도 그리스도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만나기 전까지는 결코 본향이 주는 약속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집단주의의 경고 신호
집단에 대한 갈망은 옳고 좋지만, 문제는 죄가 우리의 모든 욕망을 타락시키는 현실이다. 집단에 대한 갈망에서 집단주의로의 추락을 나타내는 신호는 무엇일까? 여기 세 가지 경고 신호가 있다.
1. 저 바깥에서는 항상 잘못된 것만 보기
우리는 비슷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끌리기 마련이다. 이는 지역 교회, 네트워크 또는 교파에서 신앙고백에 근거해서 실질적인 연합을 추구할 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잘못을 풍자하는 데도 빠르고 또 쉽게 과장하면서 우리 자신의 실패를 최소화할 때, 연합 집단에 대한 우리의 욕망은 타락한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건, 우리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값비싼 교훈을 잊기 때문이다.
선과 악을 구분하는 선은 국가를 가르지도 않고, 계층을 통과하지도 않으며, 정당을 나누지도 않는다. 그 선은 오로지 인간의 마음을 통과한다. … 그리고 가장 선한 마음속에조차도 … 뿌리 뽑히지 않은 작은 악의 구석이 남아 있다.
당신에게 행여 내가 속한 집단이 잘못을 저지를 리가 없고 다른 집단은 결코 옳은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는 않는가? 한 집단을 우상화하고 다른 집단을 악마시하는 것은 죄에 대한 부족한 교리와 더불어서 내 마음 상태에 대한 인식 부족을 반영한다. 고린도 교인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고전 3장), 이는 또한 미성숙함의 표시이기도 하다.
2. 은혜와 인내의 부족
개인적으로 또 인내를 가지고 교류하기도 전에 행여 외부인을 마음에서 무시하거나 또는 아예 드러내서 거부하는 경향을 갖고 있지는 않은가? 사도행전 18장을 보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아볼로와 몇 가지 주요 신학적 요점에서 의견이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인내와 은혜를 가지고 교류하는 모범을 보였다. 만약에 그들이 상대를 배격하고 취소하는 태도로 선교에 임했더라면, 오늘날 기독교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그들은 환대와 관용이라는 더 먼 길을 선택했다. 그들은 “아볼로를 집으로 초대하여 하나님의 길을 더 충분히 설명했다”(행 18:26).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갔던 길을 따라가도록 하자.
3. 선한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만들기
세상에는 인종과 민족의 조화에서 비롯해서 성별과 성적 지향에 관한 성경적 이해에까지 이르는 선하고 경건한 대의가 많이 있다. 그렇다 보니 우리의 삶을 좋은 것 중심으로 만들고 그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으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한 가지 방법은 완벽한 정의, 순종, 자유, 위안과 같은 천국에서만 가능한 실재를 지상의 목표로 삼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사명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것이지, 결코 당장에라도 이 땅을 자격을 갖춘 영혼이 거주하는 왕국으로 만들려고 한다든가 세상의 수단을 통해서 천국의 실체를 추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자. “우리 집단의 선한 대의가 궁극적으로 사람들을 수직적 또는 수평적 해결책으로 이끄는가? 우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찾도록 돕고 있는가? 아니면 복음이 주는 혜택과 의미를 우리 자신의 궁극적 대의로 바꾸고 있지는 않는가? 구원에 대한 열정과 추구가 다르더라도(롬 12:18), 형제자매들과의 하나 됨과 복음적 연합이 내 마음에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궁극적이고 영원한 본향으로 가고 있다. 조만간 우리는 “모든 족속과 언어, 그리고 온 세상 백성과 나라”(계 5:9)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영원한 도시에 거할 것이다. 본향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의 시선을 오로지 그리스도께만 고정하자.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가장 본질적인 정체성을 찾음으로 집단주의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싸우자.
by G’JOE JOSEPH, TGC
08.31.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