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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그림 언어와 그 상징을 잃어버린 시대에게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따라 모든 행동과 언어와 시야를 집중하는 세대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 그리고 보는 행위는 실제로 ‘경험’한다는 뜻이다. 말이 아니라 그림을 보여주는 것은 이해의 시간을 단축하기도 하지만 더 오래 기억에 남기게 하는 효율의 문제이기도 하다. 보는 것의 효과와 매력에 빠진 인류는 ‘보기’에 대한 발전을 멈추지 않는다. 

오늘날은 “숏폼(short platform)”의 시대다. 오므리 왕조 때 차원이 다르다고 평가받던 악의 모양이 오늘의 숏폼을 보면 뭐라고 생각할까? 자신이 걸음마 수준의 하수였음을 깨닫고 놀랄지도 모른다. 손가락만 터치하면 펼쳐지는 혼란과 악의 모습은 키보드로 그 내용의 주제를 담는 것도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내용들로 가득하다. 슬프지만 현실이다. 그토록 이미지의 힘을 두려워했던 기독교는 이미지 속에서 능수능란하게 수영하며 즐기고 있는 시대를 맞았다. 

나 자신을 비롯해 세상과 교회와 사람들의 모습에 때로 소망을 잃고 한마디 글도 쓸 수 없을 정도로 지칠 때가 있다.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엄청난 환상에 놀라 힘이 빠진 다니엘에게 말씀하신 하늘의 별들을 생각하면서, “지혜로운 자는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날 것이며,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영원토록 빛나는 별같이 된다”는 약속(단 12:3)을 보기 위해서다. 별들을 바라본다고 해서 드라마틱하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의 말씀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도 아니고, 어두운 세상 속에 힘을 내야 하는 모든 성경구절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다. 단지 다니엘이 느꼈을 외로움의 짙은 어두움을 느끼고, 마음 어딘가에 꽁꽁 숨어 있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내가 이 시간 살아내야 할 소명의 세포들이 깨어나는 것뿐이다. 어두움이 깊을수록 빛이 더하는 별이 되고 싶다는 생각, 주위 사람들과 그런 별들을 이루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해진다. 

진실로 하나님은 최고의 예술가시며,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인해 다채로운 상징과 이미지를 빼곡하게 담고 있는 탁월한 문학 작품이다. 하나님은 그저 말로 설명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이해하기 쉽고 경험할 수 있는 언어로 성경을 완성하셨다. 자신을 왕으로, 때로는 목자로 비유하시고, 구름과 불기둥으로 보이시며, 나팔과 우렛소리와 함께 나타나시며, 그의 등장에는 위엄있는 보좌가 그려진다. 

특히 그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들에게 명령하신 상징 행위들을 볼 때, 그것을 자세히 명령하신 하나님의 심정과 전달하시는 방법에 대해 묵상하게 된다. 여로보암에게 왕이 될 것을 예표하여 자기 옷을 열두 조각으로 찢어 그중 열 조각을 주었던 선지자 아히야의 퍼포먼스, 연합과 은총이라는 이름의 각각의 두 막대기를 꺾는 행위로 하나님의 심판을 전했던 스가랴, 삼 년을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며 포로의 삶을 미리 보여준 이사야, 토기장이의 옹기를 사서 메시지와 함께 백성의 원로와 제사장들 앞에서 깨뜨렸던 예레미야, 390일을 옆으로 누워 지내며 포위당하고 심판받는 백성의 미래를 보여준 에스겔, 그 외 수많은 행위로 순종한 이야기들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발터 아이히로트(Walter Eichridt)는 에스겔 4-5장을 주해하며 이러한 선지자의 상징 행위는 단순히 하나님의 메시지를 행동으로 보완하는 정도의 의미를 넘어, 실제적인 어떤 사건을 재현함으로 예고하고, 구경꾼들로 하여금 그 임박한 현실성에 참여하도록 이끈다고 말했다. 성경 속에는 그밖에 다양한 그림과 상징이 넘쳐난다. 독수리, 사자, 뱀, 양, 비둘기, 말 같은 동물 의 비유에서 시작해서, 백향목, 포도나무, 감람나무 같은 나무의 비유, 풀과 백합화와 살구꽃 등 수많은 식물과 열매의 비유, 예수님이 말씀하신 갖가지 생활 속 비유들, 사도 바울의 운동경기와 절제하는 군사의 비유, 전신갑주, 한 몸과 지체의 비유들, 요한의 계시록 속의 큰 붉은 용, 흰 돌, 유리 바다, 일곱 뿔, 두루마리 등 온갖 신비한 이미지와 상징들은 셀 수 없다. 이러한 은유와 비유의 본질은 하나의 사물을 다른 각도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더 깊이 경험하게 하는 것에 있다.

나는 한때 왜 하나님께서는 세겜의 상수리나무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고 그 옆에 제단을 쌓게 하셨는지(창 12:6-7), 기드온에게 천사가 나타난 곳도 하필 다른 나무가 아닌 상수리나무 아래 앉아 있을 때였는지(삿 6:11), 여호수아는 왜 “여호수아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언약을 기념하는 큰 돌을 세웠는지(수 24:26) 궁금했다. 믿음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독수리를 깊이 공부해 보기도 하고, 욥기에서 하나님께서 그토록 심하게 자랑하셨던 리워야단이 어떻게 생겼을지 밤새껏 상상해 보기도 했다. 후에 해석학을 공부하며 상수리나무에 대한 정확한 의미에 대해 함부로 추측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전문용어로는 알레고리컬한 성경 해석은 하지 말아야 한다. 바른 해석을 참고하려는 노력 없이는 잘못된 상상으로 이상한 결론에 다다르려는 유혹과 반드시 마주하기 때문이다.

그림과 이미지는 우리 기억에 큰 영향을 끼치고 우리가 상상 속에서 자유롭게 떠다니기 때문에 때로 많이 위험한 것이 사실이다. 성경 속 이미지들에 대한 주관적 생각과 사회적인 맥락 속 대중적 해석은 저자의 목적과는 크게 다른 경우가 많다. 옳은 방향으로든 잘못된 방향으로든 이러한 상징은 문자적 의미 이상의 의미와 결과를 주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때문에 성경의 시각 언어는 진리를 알아가는 것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잘못된 상상으로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림과 이미지의 매력은 진리를 일부러 가리기도 하고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도 하지 않은가? 우리는 이러한 시각 언어의 특성을 이해하고 좋은 해석의 안내를 잘 따라야 하고 그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이 수고로운 과정이 필요한 이유는 더 넓게 우리의 ‘보는 것’을 단련하고 훈련하기 위함이다. 최근 나무의사 우종영의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를 읽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갖가지 종류의 아름다운 나무들의 생태 속에서 끄집어내는 삶의 이야기가 깊이 마음을 울렸다. 그러면서도 한편, 수십 종의 나무가 언급되고 유비되고 있는 성경을 가지고도 이런 아름다운 상상에 무디어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보였다. 수많은 동물과 식물을 비롯해, 일상의 경제활동에 관한 이야기, 운동경기를 통한 은유, 건축과 그림과 음악의 유비, 법정과 시장통의 이야기, 군대의 병사 이야기, 부부와 자녀들과 가정을 통해 말하는 진리 등, 우리는 성경이 다루고 있는 흔하디흔한 일상에서 진리를 인식하는 일을 너무 쉽게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바울은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1-22) 호소했다. 바울은 예수님에 이어 수많은 상징과 그림 언어를 사용했는데, 저명한 성경해석학자 앤서니 티슬턴(Anthony C. Thiselton)은 바울이 자신의 가르침 속 그림과 이미지가 독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게 하는 투명한 창처럼 작용하기를” 원했다고 확신한다. 바울은 모든 것을 바라보고 좋은 모양은 힘써 눈에 담고, 그것으로 창을 삼아 그리스도를 가리켰다. 

동시에 바울은 넓은 세상을 바라볼 때 헤아려 악한 것은 겉모양이라도 따라 하지 말라는 중요한 경고도 잊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처참하고 끔찍한 환상을 보면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그림들이 펼쳐진다(에스겔 8장). 성전 안 은밀한 벽을 파서 뚫어 보니 그들이 숭배하는 이집트 신들인 파충류와 짐승과 괴물 그림이 보였고, 바빌론 다산의 신 담무스를 위해 애곡하는 모습, 성전 안뜰에서 하나님을 등지고 동쪽을 바라보며 태양에게 절하고 경배하는 모습을 차례차례 보여주신다. 가슴 아픈 장면들이지만 진짜 가슴이 아픈 것은 오늘날 주변에서 너무 쉽게 볼 수 있는 장면들이기 때문이다. 재미로 타로카드점을 보고 여름엔 흠뻑쇼에서 난잡한 쇼를 즐기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 하나님께서 주신 찬란한 삶을 찾아 누리는 대신 그 영광스러운 일상을 핸드폰 속 게임과 숏폼과 맞바꾼 일상의 장면들, 일부 교회에 설치된 흡연실과 노래방 등, 지금 일어나고 있는 갖가지 모양과 모습은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타락한 백성의 모양과 다르지 않다. 보는 것을 훈련하지 않으면 의도하지 않았어도 잘못된 방향으로 삶이 흘러가기 쉽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혹하다. 교회 건물 안에 들어가서 예배하고 교제하고, 성경과 찬양이라는 매개물만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영역을 축소하는 죄를 저지르게 되며, 반대로 예수님과 성경을 떠나 모든 만물에 섣부른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면 모든 곳에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범신론적 사고를 하게 될 수도 있다. 바울이 그랬듯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렌즈를 끼고 세상을 넓게 보기 위해서는, 성경의 상징과 그림으로 말하는 이야기들을 깊이 경험하고 해석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한 젊은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왜 기독교는 재미있는 콘텐츠를 만들지 못하는 것인가?”라는 오래된 고민 이야기를 들었다. 갖가지 재미에 이끌려 시선이 고정된 사람을 돌이키는 길은 더 강하고 좋은 것을 보여주고 경험하게 하는 길밖에는 없다는 전제에서 시작된 질문일 것이다. 나 또한 늘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딸이 요즘 전도서를 읽고 있는데, 갖가지 헛된 시도를 멈출 수밖에 없는 엄청난 글을 읽으며 어떻게 동시에 아이돌의 포토카드와 패션에 빠져 있을 수 있는지, 오늘도 놀랐다. 조심스러운 여정이지만, 분명히 성경 속 수많은 상징은 진리에 이르는 길이다. 성령님께 도움을 구하고 그 신비와 비밀의 세계에 발을 담그다 보면 그 즐거움에 온몸을 적시게 되고, 그 안에 펼쳐진 세계는 온 우주보다 넓고 흥미롭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이 시대 교회와 리더가 고민해야 하는 중요한 일은 성경 속 충만한 그림들을 먼저 경험하고 그 재미와 매력과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성령님께서 그들을 조명하시도록 기도하는 일이다. 

나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 하늘의 별과 같이 반짝이고 싶다(단 12:3). 그리고 함께 주의 길을 가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군대를 이뤄 어두운 시대 속에 밝게 빛나는 성운을 이루고 싶다. 눈에 보이는 구름, 파란 하늘, 이름 모를 들꽃과 아파트 화단 밑 수줍게 숨어 있는 뱀딸기까지, 창조주의 아름다움을 찾아 누리는 세대를 꿈꾼다. 지어지는 건물을 보며 하나님의 연결된 권속을 떠올리고, 모퉁잇돌 예수님께서 거하시는 교회인지 날마다 점검할 수 있으며, 길가에 모이를 찾고 있는 비둘기를 보며 그리스도가 주신 평안한 일상에 감사할 수 있는 세대가 일어나기를, 오늘도 햇빛을 찾아 처절하게 방향을 바꾸고 있는 동네 길목의 소나무들처럼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따라 모든 행동과 언어와 시야를 집중하는 세대가 일어나기를 꿈꾸며, Soli Deo gloria!

by 서나영, TGC

08.03.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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