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선하심에 관한 이야기로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던 신실한 주일학교 교사 사라가 몇 주째 교회에 나오지 않고 있다. 무슨 일이 있냐는 사람들에게 피곤하다고 말할 뿐, 그녀는 자세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고 대화를 멈춘다.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녀가 조금씩 움츠러드는 것을 느낀다. 마치 그녀의 내면에서 빛나던 빛이 어느 순간 꺼져버린 것만 같다.
결국, 사라는 주일학교 교사를 그만두었다. 처음에는 무슨 일인지 말하기를 주저하던 그녀가 속을 털어놓았다. 절망에 짓눌려 아무 곳에도 집중할 수 없고 사랑하는 일에서조차 더 이상 기쁨을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우울증을 기도와 말씀으로 극복하지 못하는 자신이 무슨 자격으로 아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겠냐며 절망했다. “나 자신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칠 수 있겠어요?”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복음이 무엇인지는 알아요. 하지만 도무지 슬픔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나는 위선자입니다.” 의사는 사라에게 항우울제를 처방했다. 그러나 영적인 문제에 약물치료를 받는다는 사실에 그녀는 깊은 수치심을 느낀다. 속내를 털어놓으면 놓을수록, 하나님께서 살려달라는 자신의 기도를 듣는지,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는지, 그리고 우울증의 어둠 속에서 씨름하고 있는 자신이 과연 그리스도인일 수 있는지, 사라의 의심이 점점 더 커간다. 우울증과 사라의 믿음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우울증에 관한 잘못된 인상
사라가 처음에 우울증을 밝히기 꺼린 이유는 부분적으로나마 교회가 정신 질환에 선고 내리는 낙인 때문이다. 사라는 언젠가 어떤 교회 리더가 “우울증은 그리스도인에게 문제가 될 수 없다”라고 했던 일을 회상했다. 또 한 번은 소그룹에서 누군가가 “아니, 복음을 아는 사람이 어떻게 슬픔과 절망에 시달릴 수 있어요? 그게 가능해요?”라며 의문을 제기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불행하게도 사라의 경험은 특별한 게 아니다.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이미 짊어지고 있는 낙담, 절망, 죄책감이라는 짐에 더해서, 믿음이 부족해서 우울증에 빠진 거라는 두려움까지 확고하게 만드는 건 다른 게 아니라 교인들의 편견이다.
잭 에스와인 목사는 여기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많은 사람의 눈에 우울증은 비겁함, 불신, 나쁜 태도를 의미한다. 그런 사람들은 기도를 하거나 친구와 대화할 때도 우울증에 걸린 건 약해서 또 영적이지 않아서 그렇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고통에 관한 오해는 우울증 환자가 교회에서 도움을 구하는 것을 아예 포기하게 할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신학적 오해나 회개하지 않는 죄가 실제로 우울증을 일으킬 수 있는데, 바로 내가 그런 경우였다. 그러나 내 경우에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깊고 확고한 이해가 회복에 결정적인 닻을 제공했다. 그러나 우울증에 영적인 요인이 있다고 해서 우울증과 신앙이 항상 상호 배타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성경의 더 깊은 관점
그와 반대로, 성경은 제자가 되는 데에는 많은 대가가 따른다고 가르친다. 죄는 여전히 세상을 황폐하게 만든다. 심지어 신자에게도 영혼을 꿰뚫는 극심한 고통이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고통을 통해 선을 이루신다. 이런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면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희망으로 그들을 다시 인도할 수 있다. 사라의 경우에 자비로운 교회 리더들과 함께 말씀을 천천히 그리고 주의 깊게 연구했던 과정은 말 그대로 생명을 주는 일이었다. 말씀이라는 렌즈를 통해 우울증의 실체를 제대로 보기 위해 씨름하면서 사라는 하나님의 주권과 자비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애통함으로 자신의 절망을 표현했고 동시에 그 모든 과정에서 교회에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 다음은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이해와 희망을 줄 수 있는 성경의 몇 가지 가르침이다.
1. 시험은 오기 마련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이기셨다(고전 15:55; 딤후 1:10). 그가 다시 오실 때 죽음의 모든 비참함은 깨끗하게 씻겨나갈 것이다(사 25:7-8; 계 21:4-5). 그러나 현재 우리는 타락의 여파로 죄가 모든 분자, 모든 세포를 부패시키고 죄의 광풍이 제멋대로 부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롬 8:19-22).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면서 그들에게 환난과 박해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마 16:24-25; 요 1:10-11; 15:20; 16:33). 그러나 그는 구원의 좋은 소식을 함께 주셨고, 또한 폭풍이 덮칠 때 붙잡을 수 있는 튼튼한 가지가 되는 산 소망을 주신다(벧전 1:3-5).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폭풍은 여전히 불어 닥친다. 세찬 바람은 우리를 불구로 만든다. 고통의 급류는 우리를 채찍질하고 비참함에 빠지게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굴복하지 않는다. 쏟아지는 우박은 여전히 우리를 때리고 신실한 그리스도인까지도 낙담하게 만들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영생에 대한 확고한 확신이 있다. 그 확신을 굳게 부여잡아야 한다. 우울증을 믿음의 결함으로 일축할 때 우리는 나의 소중한 구주께서도 참담한 슬픔을 아셨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16면으로 계속>
<1면에서 계속>
그는 아버지와 완전한 교통을 나누셨지만 동시에 슬픔을 아셨다(사 53:3). 그는 우리의 탄식을 아시고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그 모든 탄식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셨다. 절망에 빠져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훼손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다. 복음은 고통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훨씬 더 귀중한 선물을 약속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서진 세상에 넘치는 비뚤어진 방종을 초월하는 소망을 제시하신다. 고난이 우리를 짓누를 수 있다. 우울증은 신실한 신자도 무너뜨릴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 무엇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2. 고통은 선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다.
우울증을 불신앙이 초래한 고통으로 일축할 때 우리는 도움을 바라는 형제자매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단을 통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오류를 범한다. 우리가 섬기는 하늘 아버지는 사랑이 크시고 만물을 주관하신다. 그렇기에 우리의 유익과 그의 영광을 위해 우리가 최악의 고통까지도 헤쳐나갈 힘을 주신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지만, 주님은 바울의 고통을 덜어주기는커녕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고후 12: 7-9) 하셨다. 고통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우리 눈에는 이상적이지만 그게 항상 우리에게 가장 큰 유익을 주는 건 아니다. 나의 첫 번째이자 최악의 우울증 에피소드는 내 믿음을 혼란에 빠뜨린 충격적인 사건의 꼬리에서 발생했다. 그러나 명확한 유발 요인이나 선동적 사건이 없이도 얼마든지 우울증의 늪에 빠질 수 있다. 내 경우에 어느 날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보면서 햇살 가득한 아침 식탁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런 예고도 없이 사건이 발생했다. 갑자기 내 마음의 스위치 전원이 바뀌는 느낌을 받았고 순식간에 색깔과 평소의 느낌까지 온통 사라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했다. “오 주님, 제발, 안 돼요. 이건 아닙니다. 또 그럴 수는 없어요.” 이런 식의 갑작스러운 우울증이 닥치기 전까지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완고하고 성찰하지 않는 마음으로 유쾌하게 인생을 살아왔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성취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다. 그러나 가장 암울한 시간 동안 내가 하나님의 빛을 간절히 원할 때만 그는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셨다. 고난을 겪는 사람과 하나님의 주권에 관해 이야기할 때, 고난이 약한 믿음에 내리는 형벌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욥이 회개하지 않은 죄를 지었다고 부당하게 비난했던, 그의 “비참한 위로자들”(욥 16:2)과 똑같은 실수를 범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시려고 또는 생명과 호흡, 삶의 모든 부분에서 그를 의지하게 하시려고 고난을 허용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죄에 대한 형벌로 우울증에 빠지도록 정죄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우리를 위해 죄의 형벌을 담당하셨다. 그의 피는 눈보다 희게 우리를 씻어 주신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십자가가 있다. 우리는 그 십자가만 바라보면 된다.
3. ‘주님, 언제까지입니까?’
우울증을 앓는다는 사실에 너무 수치스럽고 부끄러워서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어야 한다. 역사와 성경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선포한 충실한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조차도 떨쳐낼 수 없는 슬픔과 씨름해 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현대의 예로는 기독교 작곡가 마이클 카드와 앤드류 피터슨을 들 수 있다. 두 사람 다 우울증과의 싸움을 노래로 만들었다. 이들은 수천 년에 걸쳐 성인들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다. 평생 우울증과 싸웠던 찰스 스펄전의 회상이다. “나도 얼마든지 욥처럼 ‘내 영혼이 생명보다 목을 매 죽는 것을 택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영혼의 비참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나는 기꺼이 나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도 있었다.” 심지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인 다윗도 깊은 곳에서 주님께 부르짖었다. 그는 이렇게 한탄했다.
"더 떨어질 데 없이 무너져 내린 이 몸, 온종일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니, 이 몸에 성한 데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 몸이 이토록 쇠약하여 이지러졌기에, 가슴이 미어지도록 신음하며 울부짖습니다." (시 38:6-8) 시편에는 고난의 부르짖음을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방법을 알아가는 생생한 모델이 많이 등장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위해 어둠 속을 헤맬 때, 시편은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조차도 그런 시기를 겪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도 괴로움에 빠져 그를 사모하며 부르짖었다.
by Kathryn Butler, TGC
06.15.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