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가 밀집한 키이우 교외 비쉬네브의 어느 토요일 저녁, 겨울이라 낮이 짧았다: 오전 8시에 하늘은 쪽빛으로 남아 있다가 오후 3시가 되자 어두워졌다. 다가오는 눈보라의 두꺼운 구름이 어렴풋이 보였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전력망을 공격함에 따라 연속적으로 돌아가며 정전상태가 되어 도시를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침략 당시 인구 42,000명이었던 이 도시는 중세 유럽 마을처럼 어두웠다. 가로등과 건물 표지판이 꺼져 있었다. 아파트 건물들은 발전기가 있는 여러 개의 유닛에서 나오는 노란 불빛을 제외하고는 무색의 정육면체처럼 보였다. 차량 헤드라이트가 눈길에 비추자 보행자들은 헤드램프와 손전등을 갖고 빙판인 인도를 조심스럽게 걸었다.
꽁꽁 얼어붙은 어둠 속에서 구원교회(Salvation Church)는 오아시스처럼 빛이 나고 북적였다. 커피와 구운 빵들이 공기를 따뜻하게 했다. 도시가 정전된 시간 동안 전력을 제공하는 비쉬네브의 유일한 공동체 건물이 바로 이 교회이다. 매일 식당과 지하실 등이 청소년수련관을 열어 지역사회 구성원들이 몸을 데우고 따뜻한 카푸치노를 마시며 노트북으로 작업할 수 있도록 했다.
키이우 오블라스트는 러시아 군대가 수도 주변의 주요 도시들을 급습했던 침략 초기부터 지금까지 이 먼 길을 돌아왔다. 지난해 말 어느 주일, 교회가 성도들로 가득 찼다. 목사들은 새 신자들을 세례 수영장에서 세례를 주었다. 불과 몇 달 전에 지뢰, 버려진 탱크, 시체들이 있는 폐차장이었던 키이우 외곽의 마을 보르젤에 있는 새 교회에서 합창단이 노래를 불렀다. 상점들과 약국들 그리고 커피 가판대가 열려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맥도날드에서 손가락에 묻은 기름을 핥았고, 할머니들이 아기들을 유아차에 태웠다.
구원교회에서는 운동복을 입고 커다란 흰 깃털을 들고 있는 소녀들이 다가오는 크리스마스 공연을 위해 춤 동작을 연습했다. 그들은 사방에 예수가 왕이라는 문장이 새겨진 천장 아래에서 반짝이는 음악에 맞춰 움직였다.
“저기 있는 가장 큰 아이가 제 딸이에요”라고 미콜라 사브추크 목사가 가리키며 말했다.
사브추크에게는 15살 딸과 13살 아들, 두 자녀가 있다. 침략 둘째 날 러시아 탱크가 집에서 가까운 도시에 쳐들어온 것을 보고, 그는 곧바로 가족을 우크라이나 서부에 있는 부모에게 아이들을 데려다주었다. “아이들이 고통받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사브추크은 주일 예배에 맞춰 키이우로 돌아왔다. 지난 4월 러시아군이 철수하자 부활절에 가족을 집으로 데려왔다.
일상이 점차 회복되고 있습니까?
사브추크는 “겉보기에는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국가적으로 겪은 심리적 트라우마의 정도를 가늠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 전쟁 전에 우크라이나의 삶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크고 작은 변화, 일상적인 생존의 기적을 통한 회복력, 끈기, 그리고 일상의 통제 등으로 인해 정신적 스트레스를 겪는다.
전쟁 초기, 구원교회는 교인 3,000명 중 90%를 잃었다. 절반은 해외로 대피했고, 나머지는 우크라이나 서부로 대피했다. 2월 24일의 침공 이후 첫 주일, 사브추크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일지 궁금해하며 강단으로 걸어 올라갔다. 300여 명, 약 10퍼센트의 교인이 참석한 것을 보고 놀랐다. 교회 내 16명의 목사 중 절반이 대피했다. 사브추크는 남아 있는 리더들의 정신력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떠나라고 충고했다.
사브추크는 헤르손의 제임스와 마찬가지로, 매일 밤 잠자리에 들며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밤이 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끊임없는 불확실성은 고통을 수반한다. 사브추크는 침략 5일 만에 그 충격으로 인해 한밤중에 홀로 일어나 오열했다.
하지만 한탄한 시간도 있었지만, 행동해야 할 때도 있었다. 약, 음식, 공급품 등이 당장 시급하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았다. 사람들은 피난처가 필요했고, 대피하는 과정에서 도움이 필요했고, 교회가 원조를 제공하는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기관이기 때문에 교회 문을 두드렸다.
신도들과 목회자들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 교회 지도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불신자가 교회로 오고 있다고 말한다. 구원교회는 주일 예배에 10분 분량의 설교에서 새신자를 위한 기본적인 복음을 설명했다. 사바추크는 매주 일요일 20~40명의 신입들이 교단의 전화에 응답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구원교회는 평소에도 전도를 중시했지만, 전쟁으로 인해 복음을 전해야 하는 절박함이 더 커졌다고 했다. “인생은 언제든지 끝날 수 있다. 나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봐야 한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지금은 매우 특별한 시기이다”라고 발레리 안토니우크 침례교 회장이 말했다. “이런 시련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은혜를 배가시키시는지 알 수 있다. 그건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많은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우리는 현장에서 하나님을 본다. 수확할 시기가 올 것이다. 지금은 씨를 뿌리는 계절이다.”
전쟁으로 인해 우크라이나의 사역자 중 특히 외상 치료 훈련을 받은 사람들의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 안토니우크에 말에 따르면, 침략 전에도 침례교에 관련된 500여 명의 목회자가 있었다. 이러한 갈등이 신학교에 지원하려고 고민했던 수백 명의 젊은이들을 자극했다고 말했다. 문제는 사역자들이 ‘2년이라는 단기간 안에 훈련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르핀에서 열린 침례교 전략회의에서는 전국에서 목회자와 리더쉽 200여 명이 모여 전쟁이 자신들의 사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논의했다. 피로한 여정이었지만 큰 감동도 있었다. 전시에 사역에 대한 어려움이 있지만, 사역은 절대 멈추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두려움을 느끼고 있지만 우리는 사역 중이다.”라고 안토니우크은 회의가 끝나자 그들에게 말했다. “전쟁은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다.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는다. ‘그때가 2023년이면 받아들이자.’”
헤르손 해방 이틀 만에 파벨 스몰야코프가 갈보리침례교회로 곧장 향했다. 러시아 언론에 그가 고아 밀매범이라고 보도된 후, 그는 부활절 일주일 뒤에 오데사로 대피했고, 7개월 동안 헤르손에 돌아오지 않았었다.
그곳까지 운전해서 가는 도로는 참혹했다. 지뢰밭과 거리에 훼손되지 않은 채 놓인 시체들 사이로 차를 운전해야 했다. 하지만 그의 신도들과의 재회는 즐거웠다. 그들은 서로를 껴안았다. 그들은 함께 울었다. 그들은 기도하고 예배를 드렸다.
스몰야코프가 마침내 그의 아파트에 들어갔을 때, 이상할 만큼 고요하게 느껴졌다. 침대 시트, 머그잔, 익숙한 주름과 장식품 등 모든 것은 정확히 반년도 전에 그가 두고 온 그대로 놓여있었다. 마치 바깥세상이 바뀐 사이, 집 안의 시간은 흘러가지 않고 그대로 있었던 것 같았다.
스몰야코프는 “돌아온 사람들과 떠나지 않은 사람들 모두 엄청나게 바쁘다”고 말했다. 지역 지도자로서 그는 지친 사역자들을 격려하고, 새로운 사역자들을 훈련시키고, 피난자들을 돕고 있다. 그러나 모든 교회가 같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고 그는 경고한다. 많은 교회가 흩어졌다. 교인 400명 중 4분의 3이 우크라이나와 유럽 전역에 흩어졌다. 6명의 목회자 중 스몰야코프만이 헤르손에 돌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령 기간 내내 갈보리교회에 남은 교인들은 여전히 매일 아침 10시에 함께 모여 기도했다. 사도행전 2장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처럼 매일 모여 빵과 음식을 나누며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리고 사도행전처럼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날이 갈수록 많은 것을 더하셨다.
최근 갈보리교회에는 300명의 새신자들이 등록했다. 스몰야코프는 “지도자와 성도들이 달라져 낯선 교회로 돌아왔을 때는 힘들겠지만 교회가 해야 할 일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행복한 도전”이라고 말했다.
헤르손에 있는 제임스의 교회도 전쟁 전과 같은 상황으로 회복되지는 않았다. 성도 400명 중 50명만 남아 있다. 이전에는 주일 예배 때마다 150명 되는 아이들의 웃음으로 채워지곤 했다. 이제 겨우 20명만이 남았다. 매일 러시아의 포격을 겪으며, 제임스는 “떠난 사람들은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것”이라고 말했다.
크리스마스 몇 주 전, 내가 방문했을 때 그는 나를 어둡고 추운 예배당에 데려다주었다. 화려한 무대 조명과 미디어 장비가 있는 큰 강당이었다. 한때는 유명한 공연을 했던 큰 무대이기도 하다. 이제 더는 미디어팀은 없다. 연극팀도 떠났다. 드럼이나 기타를 연주할 사람이 없다.
지난 12월, 그들은 객석을 꽉 채운 관객들에게 활기찬 크리스마스 공연을 선보였다. 2022년 당시, 제임스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예배에 참석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녹음된 찬양곡을 연주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임스 주변 교회 곳곳에서는 여러 종류의 예배가 진행되고 있었다. 나이 든 여성들은 배급을 위해 쌀을 작은 자루에 부었다. 식당을 잃은 요리사가 아내, 장모와 함께 교회 부엌에서 배추와 으깬 감자를 끓였다. 제임스의 아내는 종일 바삐 아이들을 홈스쿨링하며, 배고픈 사람들을 섬기며 뛰어다녔다. 12명의 자원봉사자가 교회 창고부터 배달 트럭까지 줄지어 서서 연결해 다른 교회에서 기부한 음식 가방을 모두 함께 내렸다.
밖에서는 러시아 로켓의 폭발하는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났고, 자주 울리는 소리에 교통 경적처럼 배경으로 흐려졌다.
“예전의 예배가 그립나요?” 내가 물어봤다.
“아니요.” 제임스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이전에는 모두 믿는 사람들이 이곳에 모였지만 이제 우리는 복음을 들어본 적 없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납니다.”
제임스는 젊지만 동시에 노쇠했으며, 활기차지만 지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작년에 너무 많은 것을 보고 겪었지만, 아마도 그가 말하는 기도의 힘으로, 어떻게든 활기찬 에너지를 끌어낼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호하고 계신다. 언젠가 한 마을에 음식과 물자를 배달하던 중, 불과 몇 분 전 자신이 지나간 길에서 러시아 탱크가 차량 여러 대를 들이받은 적이 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운전했다. 자신의 아내가 과부가 되고, 아이들은 아버지를 잃게 될 뻔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뒤를 돌아보지 못하고 식은땀을 흘리며 나아가기만 했다.
그와 이야기하는 도중 나는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생후 7개월 된 아이를 생각했다. “헤르손에 남은 것을 후회하지 않나요?” 내가 물었다.
“후회요? 아니! 아니요! 절대!” 제임스가 말했다. “우리는 최전선에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든 하나님께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의 옆에서, 그의 오른팔과 같은 사역자 한 명이 농담을 했고, 다른 한 명은 킥킥거렸다.
제임스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그는 눈은 찡그리며 웃었다. 최전방에 있게 될 줄 몰랐고, 이것들이 그의 마지막 날들이 될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기꺼이 교회와 함께 웃으며 살아갈 것이다.
04.08.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