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의 금요일이면,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슬픈 날을 기념한다. 바로 그분의 얼굴에서 피가 흘러내렸던 그날이다. 곧 가시나무를 만드신 이의 머리에 커다란 가시 면류관이 쓰여진 날,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이의 입에서 고통의 신음이 터져 나온 날, 병사들이 그 몸을 때리고, 채찍질하고, 고문한 날이다.
그날 예루살렘 밖으로 난 길을 힘들게 걸어갈 때마다, 어깨에 짊어진 십자가는 상처투성이가 된 그분의 등을 짓눌렀고, 군중은 그 모습에 몸서리를 쳤다. 저 옛날에, 모세가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던 하나님의 얼굴은 이제 사람의 몰골로 보기도 어려울 만치 상하였다(사 52:14). 온몸이 피로 얼룩진 그 끔찍한 광경을 보지 못하도록 여인들은 아이들의 눈을 얼른거렸다. 그리고 남자들은 그 십자가를 진 죄수를 향해 악담을 퍼부었다. 병사들은 계속해서 매질을 했다. 이에 천사들도 두려워 떨었으리라.
이날의 수난을 미리 내다보았던 모든 예언은 그렇게 성취되고 있었다. 그분은 그렇게 정죄와 고통을 받으며 죽음을 향해 걸어가셨다. 대적들이 나타나 그분을 쳤을 때, 함께 있던 제자들은 다 도망쳤다. 그중 하나는 그분을 팔아넘기며 배신의 입맞춤을 남겼다. 밤새도록 사람들이 때리고, 침 뱉고, 모욕하는 일이 그칠 줄 몰랐다. 아침이 되었을 때, 또다시 그 등에는 채찍질이, 뺨에는 수염을 뽑는 조롱이 행해졌다.
그렇게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그분은 갈보리 언덕을 향해 걸어갔다.
팀 켈러 목사는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에서 피터 버거의 말을 인용해서 인간의 고통의 해결책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사회학자 피터 버거는, 모든 문화는 고통과 고난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방법들을 구성원들에게 제공한다고 말하면서 기독교는 두 가지 기본적인 방식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바로 성육신과 대속의 교리다.
한 실존주의 철학자는 “죄 없는 하나님의 희생만이 무고한 이들에게 끝도 없이 쏟아지는 고문을 정당화한다. 신이 당하는 비참한 시련만이 인간의 고뇌를 누그러뜨릴 수 있다.”라고 말했다. 신약 성경에는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한 상상할 수 없는 위로들로 가득 차 있다. 절대자 하나님이 스스로 세상에 오셔서 고난의 쓴 잔을 경험했다는 것은 고난당하는 이들에게 한없는 위로가 된다.
그분은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 스스로 고난 당하신 것이다. 신약 성경은 예수님을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라고 가르친다. 자기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난을 받으셨다. 히브리서 5장 7절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통곡과 눈물을 흘리시는 삶을 사셨다고 말한다. 거절과 배신, 가난과 학대, 낙심과 좌절,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극심한 고통, 그리고 죽음을 누구보다 더 절실하게 경험하셨다. 또 십자가에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최악의 고통조차 감당하셨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 없다고 하는데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잃어버리셨다.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부르짖으며 아버지와의 철저한 단절을 경험하셨다.
신약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을 외면하고 등을 돌렸지만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주요 종교 가운데 오로지 기독교만이 신이 친히 세상에 오셔서 스스로 고난과 죽음의 길을 걸으셨다고 가르친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세상에 가득한 악과 고통을 없애주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우리에게 악과 고통이 가득한 세상 속에 절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준다. 인간은 세상의 악과 고통이 왜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어떤 것이 그 이유가 될 수 없는지는 알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거나 우리를 보살피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인류에게 궁극적인 행복을 안겨 주시려고 더없이 깊은 고난에 스스로 몸을 던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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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고난의 이유를 말해주지 않지만,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명확히 이야기하고 있다. 어쩌면 하나님이 고난의 이유를 다 알려주신다고 해도 유한한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른다.
성경은 예수님의 탄생을 전하며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마 4:16)라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면 어째서 이 땅에 가득한 고통과 어둠을 단번에 손보지 않느냐고 따지기도 한다. 세상에 있는 비극을 왜 멈추시지 않느냐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젊은 나이에 죽는 것을 택하기보다 직접 불의를 산산이 부수고 악을 끝내셨다면 어땠을까? 그 당시 모든 악을 없애주셨어도 계속 시간이 지나면서 악은 이어질 것이고, 지속적으로 악을 무너뜨리는 일을 계속해야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악과 어둠은 대부분 인간 내면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악과 고통을 쳐부술 칼과 권세를 손에 쥐고 오셨다면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정의를 실현하는 대신 악을 견뎌내셨다. 두 손에 칼을 쥐시는 대신 못박히셨다. 오랜 세월 동안 전해온 기독교의 가르침을 정리하자면, 예수님은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우리가 받아야 할 징계를 대신 받으셨으므로 언젠가는 세상에 다시 오셔서 인간을 완전히 멸하시지 않고도 악을 심판하실 수 있다.
예수님은 로마의 압제를 끝내는 정치적 프로그램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인간이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을 대신 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주님께는 더 근본적인 회복 계획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을 시작하시려고 이 땅에 태어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가 속한 사회 속에서 마주치는 무수한 악 앞에서도 무기력해지지 않고 과감히 맞서고 견디게 한다. 또한, 우리 마음에 도사린 악을 몰아내는 특별하고 강력한 능력을 가진 제자들을 이 세상에 만들어 내셨다.
그렇게 예수님은 어두운 세상 속에서도 빛이 되신다.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 사랑 때문에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바른길을 찾아갈 수 있는 소망을 가지게 된다.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끊어지지 않는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그 목숨보다 소중한 사랑 때문에 우리는 소망 가운데 고난을 견디며, 마지막 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고난을 이기며 살아가는 소망의 사람들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 아래에서 울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의 동정심으로 울어서는 안 된다. 믿음을 가지고 울어야 한다. 그럴 때 흘리는 눈물은, 부활절이 지난 후에도 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 눈물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나의 죄를 슬퍼할 때 흘리는 눈물이다. 그 눈물은, 나를 위한 싸움에서 승리한 왕을 찬양할 때 흘리는 눈물이다. 그리고 그 눈물은, 나를 위한 그 죽음을 영원히 기념하며 흘리는 눈물이다.
04.01.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