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왕”
세상의 고통과 폭력 속에서 우리는 이 소망을 굳게 붙잡고 있다. 언젠가, 예수께서는 우리를 진실되고 궁극적인 평화로 인도할 것이다. 그는 또한 우리가 경험한 구속과 그의 나라의 가치로 살 수 있도록 지금 여기서 우리가 누릴 영적 평화를 가져다주신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시다.
고난과 평화가 충돌할 수 있지만, 만약 둘 다 진리라면, 우리는 둘 다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첫째, 이 세상은 진짜배기 고통과 고난으로 가득 차 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경고한 바와 같이,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반역은 우리 자신과 세상을 뒤틀어 놓았다. 그렇지 않은 척하는 것은 좋은 말로 하면 순진한 것이며, 나쁜 말로 하면 완고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삶의 어려움에 대해 거짓말할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의 평화이시다. 싸구려거나 하찮은 방식이 아니라, 세상과 지식과 우주를 바꾸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분만이 이 고통과 어려움에 대한 유일한 답이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은, 완전하고 참된 인간이 되셨다. 이 평화의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우리의 파괴된 세상에 침투하여, 고대 예언자들의 소망을 이루는 새롭게 된 세상을 시작하신다. “그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몸으로” 죄인과 하나님 사이뿐만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 남자와 여자 사이,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 하늘과 땅 사이의 “둘로 가르는 적대의 벽”을 허무셨기 때문이다(갈라디아서 3:28; 골로새서 1:15-22).
그리고 이 두 가지 진실은 충돌한다.
예수님은 어떤 심리적인 면뿐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전 영역에 걸쳐서 우리의 평화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무감각하게 하심으로써가 아니라, 우리를 용서하고 치유하시고 그분의 사랑과 생명 안에 우리를 감싸 안으심으로서 우리의 평화가 되신다. 캄캄한 밤 즉 혼란과 의심과 혼돈이 소용돌이칠 때도 예수님은 여전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며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어려움과 깨어짐을 고통스럽고 문제 있는 것으로 인식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샬롬을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샬롬은 조화, 선함과 번영의 세상을 가져오는 반면, 우리는 전쟁, 배신 그리고 숨 막히는 자기 몰두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반역과 혼돈에 대한 대응으로, 예수님은 그의 평화, 그의 샬롬을 가져오셨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 16:33).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시킴으로써 그분은 우리의 샬롬이 되셨다. 그분은 이스라엘의 소망이시며 따라서 세상의 소망이시다.
이것이 진짜 문제 있는 세상에서 우리가 평화를 가지는 방법이다. 우리 세상 너머에서 오신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의 평화로 주셨다. 온전한 하나님이시며, 온전한 사람이신 하나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평화이시다. 그는 우리의 널뛰는 감정과 상황에 의존하지 않으신다. 그는 우리에게 고통과 어려운 문제,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선하심과 임재에 대해 거짓말을 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 둘 다 사실이다. 세상에는 어려움들이 있지만, 그 어려움 와중에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시며, 우리에게 피난처, 힘과 이 고통스러운 세상에 그의 평화를 확장하라는 명령을 주시는 분이시다. 왜냐하면 그분 자신이 우리의 평화이시기 때문이다.
올해 성탄절, 프리랜서 작가이며 입양 옹호자인 브리트니 살먼(Brittany Salmon)은, 중요한 것에 집중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세 가지 방법을 말해준다:
1. 다른 해와 다른 성탄절을 보내는 것도 괜찮다.
슬픔은 감정을 고조시킨다. 그 결과 기쁨을 가져다주던 성탄절이 오히려 더 깊은 슬픔의 이유가 될 수도 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는 자유를 당신 자신에게 선물하라. 힘들었던 해에 맞은 성탄절을 돌이켜보면, 나는 오히려 감사를 드린다. 고통은 내가 성탄절이 가져다주는 각종 과함을 던져버리고, 가장 진실하고 단순한 의미에만 집중할 수 있게 했다.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고통은 내 감정을 가장 적절한 자리에 위치시켰다.
고통에 비추어 볼 때, 성탄절이 주는 화려함과 사치는 신기하게도 희미해진다. 그리고 성탄절의 진짜 의미가 슬픔의 잿더미를 지나 내게로 다가왔다. 올해는 오로지 거기에만 집중하고, 절망을 촉발하는 다른 모든 것은 내려놓도록 하자.
2. 주변을 오로지 진리로만 채우라.
슬픔과 시기와 불만이 가져다준 신체적 부작용은 어느새 내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평소 내가 잘되기를 바라던 사람들에게서조차 질투를 느낄 정도였다. 나는 그들이 가족과 직장에서 행복하고 또 즐거운 성탄절을 누리길 바랐었다. 가까운 친구들에게 나의 죄를 고백했다. 그중 한 사람인 카운셀러는 내가 마음속으로 그리는 이미지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라고 충고했다.
사랑으로 당신에게 지원을 베풀 사람과 자원으로 주변을 채우라. 지금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알도록 하는 것에서 시선을 떼어 놓으라. 대신 이미 당신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향해서 시선을 집중하도록 하는, 영적 성장에 도움을 주는 음악, 팟캐스트, 책을 선택하라. 간단히 말해서,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가정과 마음, 그리고 관계에 생명을 주는 진리이다. 복음의 은혜라는 빛 가운데 고통과 기쁨이 함께 거하도록 하는 진리로 주변을 가득 채우라.
3. 소셜 미디어를 멀리하라.
고통이 우리 가족을 덮쳤을 때, 나는 잠시 소셜 미디어를 쉬었다. 당시에는 그런 결정이 어리석게 보였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것처럼, 페친의 가족과 파티 사진이 올라올 때면 나는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허락하셨지만, 내게서는 빼앗아 간 것들 때문에 힘들어했다. 나는 어느새 하나님이 내 삶에 쓰신 슬픈 이야기를 인생의 절정기에서 행복해하는 것 같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고 있었다.
올바르게만 사용한다면, 소셜 미디어는 전 세계의 가족 및 친구들과 소통할 수 있는 환상적인 도구이다. 하지만 소셜 미디어가 타인을 비판하는 도구가 되고, 내 삶을 부정적으로 비추는 거울이 되고 있다면, 거기서 잠시 벗어나라. 친구 및 가족과 오프라인에서 정직하게 또 나를 다 드러내는 교제의 시간을 가지도록 하라. 화면이 아니라 실제로 만나는 공동체와 함께 성탄절을 보내라.
신자들이여,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부서진 것들을 온전케 하시기 위해서이다. 구유에 있는 아기를 생각하면, 상처받고 보내는 성탄절도 그리 문제가 될 게 없다. 상처를 부정하지 않고 성탄절을 보내는 것은 괜찮지만, 그 상처가 더 큰 이야기를 가리키는 도구가 되도록 하라.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고통을 보고 계신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신다. 이 진리 안에서 안식하며 큰 슬픔 가운데서도 큰 평안을 찾는 은혜를 누리기를 바란다.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슬픈 날조차도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시는 예수님의 탄생을 우리 함께 기뻐하자.
12.17.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