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에 관한 이야기는 주로 남자들에게 집중되기 마련이다. 설교자, 신학자 그리고 순교자. 그들의 사역은 종교개혁의 틀을 잡았고, 그만큼 중요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또한 여성들의 활동도 매우 중요했던 시기였다고, 작가인 레베카 밴두디와드(Rebecca VanDoodewaard, 'Reformation Women: Sixteenth-Century Figures Who Shaped Christianity’s Rebirth' 저자)는 강조한다. 즉 종교개혁 시대 여성들의 사역은 주로 다음 세 가지 영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가정에서 봉사함으로 개혁을 가속화하고 다음 세대 개신교인(Protestant)을 키워낸 것; 권력의 자리에서 봉사함으로 개신교의 자유를 수호하거나 증진시킨 것; 그리고 글과 출판을 통해서 개신교 사상을 고양시킨 것(The Women of the Reformation).
초창기 개혁가들의 아내는 가정을 사역의 기초로 삼는 데 탁월했다. 가정은 단지 남편이 휴식을 취하거나 가족이 모여서 교제를 나누는 곳만이 아니었다. 가정은 복음 사역과 복음 전파에 필요한 전진 기지(outposts)였다. 가정은 여행자들이 쉬면서 충전하는 곳이었다. 가정은 여성들이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이를 주는 식료품 저장실이었다. 경건한 가정은 종교개혁의 풀뿌리였으며 종교개혁에 연료를 공급하는 충전소였다.
이런 가정 사역에 있어서 단연 첫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사람은 카타리나 루터(Katharina Luther, 1499–1552)다. 유명한 만큼 신경 쓸 일이 많은 그의 남편은 그녀에게 자연스럽게 많은 역할을 맡겼다. 그녀는 개신교 아내들이 앞으로 걸어갈 길을 닦은 사람이고, 과거 수도원이었던 곳을 생산적인 가정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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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lack Cloister(루터의 집으로 사용됐던 수도원)은 여러 면에서 종교개혁의 본부가 되었다. 거기서 마틴 루터는 공부하고 글을 썼고, 카타리나는 저녁이면 그의 작업에 대한 피드백을 주었다. 루터가 학생들을 초대하면 카타리나는 그녀가 직접 재배한 재료로 음식을 준비하고 토론에 참여하기 위해 테이블에 함께 앉았다. 아이들은 집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루터의 친자식들 외에 그가 입양한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수도원에서 미래의 목회자들은 그리스도인 가족이 어떻게 살고 움직이는지를 목격했다. 낡은 수도원이 카타리나의 손에 의해 개혁의 중심지로 변모했다. 그것은 마치 그녀가 느끼는 구원의 기쁨이 그녀 속에서만 끝나지 않았기에 그녀의 가정을 통해 육체적 그리고 관계적인 형태로 표출된 것만 같았다.
스위스 종교개혁에서 카타리나의 가정과 비슷한 영향을 끼친 것은 안나 불링거(Anna Bullinger, 1504–64)의 가정이다. 아이가 열한 명이나 있음에도 그녀는 엄청난 숫자의 개신교도 손님들과 열두 명에 이르는 피난민들을 한 번에 집에 받아들였다. 이 부부의 가정은 한마디로, 안나가 쉬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른 기독교인에게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집 또는 교회에 있지 않을 때면, 안나는 취리히의 빈민들을 찾아서 음식과 옷, 그리고 돈을 주었다. 그녀는 남편 훌드리히(Huldrych)가 전투에서 사망한 후 내내 돌보던 안나 츠빙글리(Anna Zwingli)의 모범을 따랐다. 안나 불링거는 손님들을 통해, 또 결혼과 가족 생활에 대해서 쓴 남편의 글을 통해 온 유럽으로 알려진 모범이 되었다.
종교개혁 시절 목사의 부인들이 자신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집과 가족을 개방하는 것은 금욕주의를 지향하는 수도원 생활(monasticism)에 대한 공개적인 비난이었다. 이런 성경적인 생활 방식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직, 결혼 등에 관한 교리에 직접적인 도전이었을 뿐 아니라, 수녀원과 수도원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개신교 목사의 부인들은 지난 수 세기 동안 수도사과 수녀가 해왔던 것과 똑같이 기도하고, 책을 읽고, 정원을 가꾸고, 아픈 사람을 돌보고, 여행객을 맞았고, 또 학구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 개신교인의 부인들은 수도원주의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비록 그런 활동이 항상 눈에 띄는 건 아니었지만, 그들은 가정 사역을 통해서 로마 가톨릭이 당연시 여기고 있던 전제를 공격함으로써 로마 가톨릭이 수세에 처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자녀 양육을 통해서 로마 가톨릭의 박해에 직면해서도 오로지 성경만을 붙잡고 설 준비가 된 새로운 세대의 개신교도를 키워냈다.
여왕과 공주들은 종교개혁 기간 중에 공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남자들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의 왕족 여성들이 개신교로 개종했다. 그들은 남자 혈족들보다 훨씬 더 쉽게 믿음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은 정치적 시류도 따르지 않았다. 유명한 개신교도들은 종종 쉽게 표적이 되었다. 고위직 수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수녀원장은 종종 귀족 출신이었고, 개신교로 개종하는 경우에 엄청난 스캔들에 휘말려야만 했다. 종교개혁자의 부인들이 무대 뒤에서 엄청난 양의 사역을 감당한 반면, 종교개혁에 참여한 여왕들과 수녀원장들은 가장 공개적인 방식으로 고립과 협박, 그리고 폭력에 직면해야만 했다.
잔느 달브레(Jeanne d’Albret, 1528–72)는 알콜중독자이자 외도를 일삼던 남편이 1555년에 죽자, 나바르 왕국(Navarre)의 여왕이 되었다. 프랑스와 스페인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위치한 나바르 왕국 여왕의 위치는 취약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그녀는 지체하지도 또 낙담하지도 않았다. 이미 수년 전에 종교개혁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한 잔느는 그녀의 왕국을 로마 가톨릭의 바다에서 안전한 안식처를 찾는 사람들의 피난처로 만들었다. 그녀의 아이들이 납치되었고, 그녀의 삶은 위협을 받았으며, 반란과 프랑스와의 전쟁까지 일어났다. 그러나 교회를 향한 그녀의 사랑은 이 모든 환난보다 더 컸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작은 공주”라고 불렀으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지키기 위해 에스더처럼 자신을 지금 이 위치에 두었다고 믿었다. 그녀는 프랑스의 종교 전쟁 내내 위그노(Huguenots, 프랑스인 개신교도를 부르는 말)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그녀는 고난을 견디는 믿음의 본보기였다. 그녀의 용기와 교리적 확신은 국제적으로도 논의가 되었고, 고통받는 다른 신자들에게 위로를 가져다주었다.
카타리나 본 지먼(Katharina von Zimmern, 1478–1547)은 힘든 유년기를 보냈고 결국은 수녀원에서 살게 되었다. 그녀와 그녀의 자매는 사제들에 의해 성추행을 당하고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얼마 후 카타리나는 다시 수녀원으로 돌아갔고 결국 취리히 전체를 책임지는 수녀원장이 되었다. 엄청난 양의 토지와 현금 그리고 사람들을 관리하는 자리였다. 로마 가톨릭은 자신들이 지명한 사람들에게는 너그럽고 관대했다. 그러나 취리히 전체 도시와 마찬가지로 카타리나도 개혁주의 신앙에 노출되었고, 어느 시점에서 개신교로 회심하게 되었다. 그녀는 개신교 목사들을 초대하여 수녀들의 라틴어 교육과 영적인 관리를 부탁했다. 츠빙글리(Zwingli)는 수녀원장이 가진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라면 개신교 활동을 폭로할 수도 있었고 또 로마로부터 지원세력을 요청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츠빙글리의 우려와 달리, 1524년 말에 카타리나는 수도원과 모든 재산을 취리히시에 넘겨주었다. 이것은 로마가 잘못되었고,
그런 로마에 저항해야 한다는 개인적인 확신을 평화롭지만 강력하게 드러내는 방법이었다. 재산 양도는 이 도시에 경제적 이익 이상을 가져다주었다. 취리히는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내전 없이 개신교도에게 공개적으로 자유롭고 안전한 장소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카타리나는 이제 로마의 공개적인 적으로서 매우 취약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녀를 보호했고 남편과 딸까지 주었다. 그리고 대중을 향한 카타리나의 리더십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중에 그녀는 시의회에서 활동했다.
카타리나와 잔느는 단지 개신교로 회심한 여성 정치인과 여성 종교 지도자가 아니다. 하나님은 로마 가톨릭 왕실과 교회 정부의 부패한 시스템을 사용하여 진리에 대항해서 싸우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그들을 통해서 여실히 보여주었다. 로마의 성문은 무장한 교회에 비하여 결코 우세하지 않았다.
여성이 종교개혁에 기여한 세 번째 중요한 방식은 바로 글쓰기를 통해서였다. 글쓰기는 아주 현대적인 형태 같지만, 중세에도 글을 쓰고 출판까지 하는 여성들이 더러 있었다. 교육과 문맹퇴치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종교개혁은 수많은 개신교 여성 작가들을 만들어냈다.
종교개혁 이전 시대의 여성들에게 지배적인 장르는 종교시였다. 개신교 여성들은 이 전통을 버리는 대신에 그 장르를 발전시켰다.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Marguerite de Navarre, 1492-1549)는 개신교 최초로 출판한 여성 시인이었다. 초기 로마 가톨릭에서 시작해서 칼빈주의가 강하게 드러나는 시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시는 그녀의 영적 여정을 반영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단지 이 시들이 개인적인 묵상의 기록이 아니라 개혁주의 교리를 선명하게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마르그리트의 마지막 주요 작품은 그리스도가 당신의 백성을 위해 완전하고 완벽한 구속 사역을 이룬 것을 강조하고, 그 사역을 향한 경이로움을 표현하는 내용이다. 그 작품을 출판함으로써 그녀는 성자, 방종, 참회, 그리고 미사에 관한 로마의 가르침에 도전했다. 그녀의 작품은 결국 오직 믿음과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진리에 대한 공개적인 선포였다.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신학적 내용을 담은 개신교 작품을 쓴 여성들도 있다. 가장 먼저 알려진 것은, 성직자는 결혼하면 안 된다는 로마 가톨릭 교리에 반해서 얼마든지 성직자도 결혼해도 된다는 내용을 담은 작품이다. 그것은 카타리나 젤(Katharina Zell, 1497–1562)이 사제이기도 한 남편을 지키기 위해서 쓴, 매우 개인적인 방어이기도 했다. 카타리나 부부는 당시 성경법에 위배되는 결혼을 한 것 때문에 공격을 받고 있었는데, 카타리나 젤은 성직자들 사이에 만연한 매춘에 세금을 부과하는데 아무런 문제점을 찾지 못하는 교황이라면, 그런 교황이 신실한 결혼에 반대하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다고 이 책에서 주장했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성경을 근거로 내세운 카타리나는 일종의 금기로 취급되던 결혼 문제를 공공 토론의 자리로 끌어올렸을 뿐 아니라, 결혼한 사제들에게 찍히는 낙인을 상당 부분 제거하는 데도 기여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회고록도 인기를 얻었다. 샬롯 드 모네(Charlotte de Mornay 1550-1606)는 남편의 삶에 대한 글을 썼고, 그 결과 그녀의 남편은 유럽 전역에서 유명해졌다. 근면한 노동과 신실함, 그리고 고난으로 인한 괴로움에도 원한을 가지지 않는 그의 모습은 고난 속에 있는 수많은 신자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이 기간 중에는 알려지지 않은 더 많은 여성들이 있었다. 어떤 이는 개인 성장과 여가 활용을 위해서 글을 쓰기도 했지만, 또 많은 이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개혁 교회를 위해서 글을 썼다. 그들의 명백한 지적 능력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두뇌를 사용해야 한다는 개신교의 신념과 일치했다. 또한 차세대 종교개혁 여성들을 교육하는 개신교 어머니들에게는 그들의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들은 차세대 어머니, 작가, 설교자, 여왕을 키우는 여성들에게 꼭 필요한 훈련을 제공하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시대별 또 인물별로 분류해서 잘 보이는 곳에 두는 식으로 대충 흘려듣는 것은 쉽다. 그러나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하다. 어떤 여성들은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영역 전부에서 활약했다. 또 어떤 이는 한 영역에서 특별히 탁월했다. 그들이 끼친 영향은 실로 놀라웠는데, 그것은 그들이 섬기는 구주가 전지전능하기 때문이었다. 이 여성들은 예수님을 사랑했고 섬겼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늘도 여성들을 여전히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녀들이 지금도 변치 않고 교회를 섬기는 것을 기대해도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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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