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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목련

연못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에 대조해서 나무에 그렇게 고결하게 피어나기에 목련(木蓮)의 이름이 주어진 것으로 본다. 겨울 지나 청명절이라 싶으면 개나리 꽃잎이 트기 시작하고 진달래도 그 뒤를 따른다. 샛노랗게 떨기로 피어나는 개나리 동산도 가볼만 하다. 진달래 동산도 그러하거니와 나뭇잎 몽땅 떨어져 버린 벌거벗은 듯 한 나무에 그렇게 고결하게 꽃만 먼저 피어나는 목련을 볼 때, 그 깨끗한 하얀 꽃이 한 나무 그득히 피어남을 볼 때 하나님의 그 조화를 다시금 감탄하게 된다. 새벽기도회 오는 길가에 목련이 나날이 봉우리로부터 툭 터지면서 그 고결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 꽃을 아침마다 감상한다. 그 앙상한 벌거벗고 있는 나무에 옷도 입지 않았는데 그 고결한 한 꽃이! 어떻게 어떻게!! 물리적으로 그 나무속을 샅샅이 쪼개서 현미경으로 검사해본다 해도 어디서 그 고결한 정결한 흰 꽃이 나오는지 알 수는 없다. 화학적으로 분해를 해봐도 여기서 나오는구나 해석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창조하신 그 신비함을 인간이 설명할 수 없으리라.

내가 중국에 있을 때 한 공원에 목련만 심은 화원이 있었다. 그때는 수많은 목련이 그 동산에 그득했다. 그 고결한 꽃이 그 토하는 향기를 가서 마음껏 흠향할 수 있었다. 봄철이면 한 번 찾아가는 곳이었다. 하나님께서 욥을 가리켜 이 사람은 순전하며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세 번이나 욥기 1장 2장에 말씀하신 바 있다. 그의 속성 가운데 첫째 순결하다 하심이다. 그 고결한 품성을 말씀하심이겠다. 주님께서 나다나엘이 빌립의 인도로 자기에게 나오는 것을 보실 때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로다 그에게 간사한 것이 없음이로다” 하심도 우리는 기억한다. 욥같이 나다나엘 같음이 목련의 고결함에 비길 수 있을까 한다. 욥 같은 나다나엘 같은 무리가 있다면, 내 옛날 중국 청도 제일공원에 목련동산을 본 그대로 돌고 돌면서 감상한 생각을 하면서, 오늘 욥 같은 나다나엘 같은 이들이 사는 동산이 이 땅에 있을까. 이스라엘을 애굽의 질고에서 구출하신 후에 이스라엘은 노래하는 가사 중에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출15:17). 그 동산이 그립다. 주께서 심으신 그 동산에서 그 고결한 목련같은 품위 또 향기를 맡는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른 초봄 목련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뽑아 내시사 주님의 기업에 심으심이 죄인들을 구원하여 주의 동산에 심기운 선민이다. 죄악의 질곡에서 보혈로 풀어 내시사 속죄 사죄 구원의 동산에 심운 성도들이 다 뼈대만 앙상한 겨울을 지난 목련 같건만 새봄 소식을 전해준다. 고결, 성결한 향기 풍기는 목련같이 성도는 살게 됨이다. 자기 스스로 작심해서는 아니다. 하나님의 동산에 구원의 동산에 심기워서이다. 목련만 심기운 넓은 동산에 가면 떠날 마음이 없다. 시각에 들어오는 그 고결 성결한 하얀 티 없는 순수한 그 빛, 후각에 들어오는 그 향기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하노라”(아4:16). 그가 심으신 동산에는 향기가 그득하다. 혹 매운 하늬바람(북풍)이 불어 닥치기도 하고 온화한 봄바람이 불어오기도 한다. 순풍도 있고 역풍도 분다. 어느 바람이 불건 바람 따라 향기는 날린다. 내 사랑하는 자를 부르는 향기다. 그 향기를 맡으시려 자기가 심으신 동산을 찾으신다.

심기움을 받은 자라야, 그 구속의 동산에 심기운 자는 이 고결한 목련 꽃을 피운다. 이 성결한 향기를 풍긴다. 그 심으신 동산, 이 심기운 나무, 우리 신랑의 시각 후각을 만족시키고 그 전 감각을 만족시킨다. 이 동산이 교회의 모습이다. 교회동산은 우리 주님의 감각을 만족시켜 만족할 뿐이다. <1999년,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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