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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융단의 대부분은 중동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만들어진다고 한다. 숙련된 장인의 지도 아래 남자들과 어린 소년들이 한 팀이 되어 한 장 한 장 만들어낸다고 한다.

대개 그 융단은 밑 부분에서 위로 짜 올라가는데 사람이 딴 생각을 하다가 실수를 저질러 미리 정해 놓은 무늬와 다른 빛깔이 나오는 수가 더러 있다. 이런 실수가 발생했을 때 지도하던 장인은 융단 전체의 빛깔을 맞추기 위해 잘못 짜여진 실을 뽑아내는 것이 아니라 잘못 들어간 빛깔이 전체 무늬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들은 실패를 성공작으로 만들기 위해 멋진 조화를 이룩해 나가는 사람들이며 개인의 실수를 탓하기보다는 그 실수를 수용하고 긍정적으로 조화시키는 예지를 지닌 사람들이다. 실수란 융단 만드는 과정에서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부단히 일어나고 있는 길고 짧은 과오이며 착오다. 다시 말하면 언제 어디서 누구라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보는 눈과 대하는 태도에 달려있다. 내 실수는 과소평가하고 남의 실수는 과대 포장한다든지 한번 실수 때문에 삶을 포기한다든지 정죄한다든지 하는 등의 자세는 값비싼 융단을 짜내는 장인의 슬기는 아니다.

어느 날 이른 아침에 호사가들에게 포위된 채 성전 뜰에 엎드린 한 여인이 있었다. 지난밤에 저지른 불륜 사건 때문에, 그리고 그 현장이 노출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끌려온 여인이었다. 잠시 후면 그 여인은 모세의 율법대로 성 밖으로 끌려 나가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운명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녀를 에워싼 채 씩씩거리고 서 있는 남자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심으로 긴박한 사태에 돌파구를 열어 놓으셨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우리는 이 사건 속에서 세 종류의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순간의 향락 때문에 즉결처형을 받게 된 여인의 모습이고, 둘째는 자신들의 죄는 뒤로 감춘 채 저마다 돌을 쥐고 서 있는 철면피한 남자들의 모습, 그리고 셋째는 용서와 경고의 장을 펴신 주님의 모습이다. 위와 같은 장면은 때로 어느 곳에서나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한 가지 과오 때문에 그를 매장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가 하는 것과, 실수나 과오가 용납된다는 이유로 그 잘못을 되풀이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인간 존재, 그것은 가녀린 갈대이며, 나부끼는 가랑잎이며, 떨어뜨리면 깨지는 질그릇이다. 제아무리 현대 문명의 금자탑을 이룩했노라고 호언하는 현대인의 높고 높은 콧대도 실낱같은 힘에 불과하다. 한 여인의 비극적 종말을 용서와 희망과 새 출발로 바꾸어 놓으신 주님의 사랑과 넓은 뜻은 오늘 우리네 삶의 길목에도 넘쳐나야 한다. 다만 우리네끼리 옹졸하고 치졸하고 편협할 뿐이다.

교회는 주님의 품과 같고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품 안에서 평화를 얻은 어린아이와 같아야 한다. 그리고 기독교인의 삶은 삭막한 길목 곳곳에 장미를 심고, 라일락을 심고, 코스모스를 심고, 동백을 심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이 땅을 꽃피고 새들이 노래하는 동산으로, 전원의 교향곡이 울려 퍼지는 낙원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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