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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때문에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원로)

요나서의 핵심은 하나님의 무차별 구원과 요나의 책임으로 대별된다. 앗수르 수도 니느웨야말로 심판받아 마땅한 도시였다. 도시의 죄악상이 그랬고, 민족 감정 역시 연민의 정을 둬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 도시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요나와 달랐다. 갈등하고 고뇌하는 요나를 내몰듯 니느웨로 보내셨고,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토록 재촉하셨다. 그러나 요나는 마지못해 길을 떠났을 뿐 다시스로 가고 있었다. 바로 여기서부터 가기 싫은 요나와 기필코 보내시려는 하나님과의 실랑이가 시작된 것이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은 강제노동이다. 마지못해 하는 일은 능률도 효과도 없다. 프로 선수는 일정의 돈을 받고 그라운드를 누비지만 아마추어 선수는 제 돈으로 옷 사 입고 운동장을 달린다. 프로는 책임이 뒤따르지만 아마추어는 그냥 즐기면 된다.

요나는 전문가로 부름 받은 프로였다. 그래서 그는 제멋대로 가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요나가 깨달은 것은 풍랑 속에서였다. 풍랑은 인생을 깨닫고, 사명을 깨닫게 하는 몽학선생이었다. 책임의 소재조차 파악하지 못했던 요나가 드디어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시오. 당신들이 이 풍랑을 만난 것은 다 나 때문이오”라고 직고할 수 있었던 것은 풍랑 덕택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부터 실타래처럼 얽혔던 문제가 풀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는 요나가 없다. 문제의 속 깊은 곳을 깨닫는 사람도 없고, 그 문제의 주범이 자신이라고 인정하거나 고백하는 사람도 없다. 역사가 꼬이고, 세상이 어려워도 누구 한 사람 “나 때문이오”라고 허리를 꺾는 사람이 없다. 저마다 “너 때문이다”라며 상대를 짓밟고, 매도하는데 열을 올릴 뿐이다. 결과는 뻔하다. 갈등, 투쟁, 대립, 분열, 증오로 치달을 뿐이다.

구상(具常) 시인의 “자수”라는 시가 떠오른다. “그 어린애를 치어 죽인 운전수도 바로 저구요/그 여인을 교살한 하수인도 바로 저구요/그 은행갱 도주범도 바로 저구요/실은 미궁에 빠진 사건이란 사건의 정범이야말로 바로 저 올시다/(중략)이제 기꺼이 포승을 받으며 고요히 교수대에 오르렵니다. 최후에 할 말이 없냐구요?/솔직히 말하면 죽는 이 순간에도 저는 최소한 4천만과 공범이라는 이 느낌을 버리지 못해 안타까운 것입니다.”

그렇다. 4천만은 공범이다. 우리 시대가 이렇게 파국으로 치닫게 된 것은 네 탓, 내 탓이 따로 없다. 4천만이 공범이며 천이백만의 방조로 빚어진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책임의 과녁을 자신에게고 돌려 너 대신 나를 못 박은 대속사건이 아닌가. 세상만사가 꼬이고 얽혀도 단 한사람도 “나 때문에”라고 실토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나 때문이오”라고 말하면 자리에서 밀려나고 굴러 떨어질까 봐 겁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스의 파국은 “나 때문이오”라는 고백으로 수습되지 않았는가?

“나 때문에”라고 말하는 지도자가 그립다. 자존심을 챙기고, 책임 모면을 위해 사설을 늘어놓는 그런 사람들로는 풍랑도, 파국도 수습할 길이 없다. 요나 사건의 교훈은 현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이며, 떠넘기기에 급급한 지도자들에게 내리시는 경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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