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원로)
인생의 끝자락은 죽음이다. 실패가 두렵고, 질병이 두렵다지만 죽음보다 더 두렵고 무서운 것은 없다. 죽음은 예외도 차례도 없다. 누구나 가는 길인 줄 알면서도 자신은 예외일 것으로 착각케 하는 괴력을 가진 것이 죽음이다. 영국의 물리학자였던 올리버 로지 경의아들이 1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일이 있었다. 전사하기 전 보낸 편지 안에 “제 무덤에 오지 마십시오. 저는 거기 없을 거니까요”라는 글귀가 있었다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내가 죽거든 아무데나 묻어다오. 하나님께는 멀고 가까운 곳이 없느니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예외 없이 찾아오는 죽음을 종말적 사건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로 나가는 출발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앞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절망과 공포가 되고, 뒤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여는 출발점이 된다. 동일한 죽음을 놓고 이토록 상이한 차이가 나는 것은 마음자리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누구를 믿느냐에 따라 입장과 처지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힘의 근거는 부활 신앙에 있다. “죽어도 살고 살아도 산다”는 부활 신앙은 겁날 게 없다. 환난도 핍박도 죽음도 겁날 게 없는 것은 죽어도 살고, 망해도 흥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부활을 믿기 때문이다.
바울이 불렀던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7)라는 개선의 노래야말로 다시 사는 부활 신앙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사람은 흉기나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아니라 죽음을 겁내지 않고 목숨을 내놓는 사람이다. 초대 기독교 말살을 꾀했던 박해자들이 놀랐던 것은 기독교도들이 화염에 휩싸여 불타고, 맹수의 공격으로 쓰러지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초연성 때문이었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죽음 자체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죽음 너머에 있는 부활의 새아침을 내다보는 예견과 신앙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스데반이 웃을 수 있었고, 바울이 개선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고, 베드로가 ‘쿼바디스 도미네’를 외칠 수 있었던 것이다.
화가 미켈란젤로가 어느 날 제자에게 말했다. “그대는 왜 그토록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많이 그리는가? 죄와 죽음의 정복자, 승리하신 영광의 그리스도,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많이 그리도록 하게나”라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죄와 사망을 이기신 승리의 선포이며 개선가다.
온통 세상이 먹구름으로 뒤덮여도 구름 속에서 금방 뛰쳐나온 해를 그릴 수도 있고, 깜깜한 먹구름을 그릴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먹구름을 계속 그리다보면 점차 그 먹구름이 삶을 뒤덮게 된다는 것이다. 부활의 새아침 동트는 저 언덕을 바라보며 소리 높이 외치자, 예수만세, 예수 만만세! 역사 이래 죽음을 이긴 자 누구이며, 다시 살아난 자 누구인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의 우월성과 유일성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기독교가 영원한 삶을 선포하는 생명의 종교라는 것을 웅변한다. 예수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