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 ‘창세기’에 의하면 다양한 종족과 언어의 출발은 바벨탑 사건 이후부터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전의 상태는 한 언어, 한 구음, 한 종족이었으나 그것을 구실로 인간들은 헛된 일을 경영하기에 이르렀고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고 온 지면에 흩어버리셨다. 그들이 경영했던 헛된 일이란 하늘에 닿는 탑을 쌓아 인간의 능력과 이름을 높이고 명성을 떨치자는 것이었으며 하나님을 대적하자는 것이었다. 오늘 우리가 겪는 종족간의 갈들이나 방언의 혼잡은 바벨탑 사건으로 자초한 심판의 결과인 것이다. 그 후로 인간들은 방언이나 종족의 단일화를 위해 노력해왔으나 그 노력은 무위로 끝나곤 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오순절 사건은 방언의 통일 가능성을 예시해 주었다. 물론 오순절의 방언 사건은 복음의 세계를 위한 성령의 비상조치였다. 그러나 오순절 사건이 방언으로 표출 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오순절의 방언 사건은 그 당시로서는 각각 다른 방언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공통된 방언으로 말하고 들을 수 있었다는 기적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그 사건은 그 차원을 넘어 영원한 세계에서 천국시민들이 사용하게 될 통일된 방언의 예표적 의미를 제시해준다. 하나의 민족 공동체가 형성되려면 이념이나 관습에 앞서 동일 언어의 사용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것은 의사소통이 전혀 불가능한 개인이나 집단끼리는 공동체 형성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동안 세계는 자보(自保), 자위(自衛), 자익(自益)을 위해 연합 공동체 등을 만들었다. 예를 들면 안전보장을 전제한 국제연합이라든지, 구라파의 정치 경제 통합을 전재한 이유(EU)라든지, 아시아 국가들의 아세안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시한부적 연합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이합집산이 가능한 것들이다.
그러나 교회는 궁극적으로 하나일 뿐이다. 인간들의 손과 머리로 교파를 만들고 교리를 만들어 저마다 색다른 간판을 내걸긴 했지만 그 간판들은 지상에서만 유효한 것이다. 그렇다면 구태여 한시적 지상교회들이 교파지상주의나 교권지상주의의 포로가 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자생단체들 가운데 교회만큼 그 뿌리가 깊고 그 나무가 큰 공동체가 없다. 그리고 교회만큼 힘을 가진 단체도 없다 교회는 두 가지 힘을 향유한다. 하나는 조직 속에서 생성되는 가견적 힘이며 다른 하나는 위로부터 임하는 신령한 힘이다. 그것은 곧 눈에는 보이지 않는 힘인 것이다. 교회는 그 힘을 중심으로 하나의 교회를 지향해 나가며 발전해 나간다. 교회는 지엽적이거나 자질구레한 사건들이라면 견해를 달리하고 입장을 달리한다. 그러나 중대한 문제들, 예를 들면 진리수호라든지 교회의 존폐문제라든지 선교의 장애가 발생한다든지 하는 등의 사태가 돌발할 때는 뜻과 행동을 집합한다. 그것은 교회의 궁극적 목적과 지향점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다양성 속의 일치를 실감할 수 있는 공동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교회다. 소리 없이 잠잠한 것 같으면서도 건드리면 그 소리가 큰 공동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움직이면 그 반경이 큰 거인, 침묵하다가도 포효하는 생명체, 바로 그것이 교회인 것이다. 그 뿐인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면서 섰다하면 교회라는 빈축을 받으면서도 그 깊이를 따져보면 단 하나로 귀결되는 공동체인 것이다. 그러기에 역사도, 정권도, 그 어느 집단도 교회를 함부로 다루지 못했고 심지어 무신론 세계 속에서도 죽지 않고 생명력을 지녀온 강인한 공동체인 것이다. 그리고 그 교회는 영원한 교회로 들림 받을 때까지 계속하여 성장할 것이며 성숙을 향해 진일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