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원로)
문 닫힌 방, 두꺼운 커튼으로 밀폐되고 차단된 공간, 그곳에는 대화도 만남도 그리고 빛도 존재하지 않는다. 창문을 닫고 커튼을 드리운다는 것은 들어오려는 것을 막고 나가려는 것을 통제하려는 발상과 행위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공간개념에서도 그리고 한 사람의 인격과 신앙에도 일어날 수 있다. 자폐증이라는 것은 그것이 자의이든 타의이든 간에 단절과 밀폐와 외면의 복합이며 병적 표출이다. 신앙생활의 경우에도 동서남북을 차단한 채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그럴싸한 이유를 내세워 밀폐 신앙만을 고집하는 경우들이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신앙인라는 허울을 쓴 채 하나님과 만나야 될 창문을 모두 닫아버린 채 질식해가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가고 있다는 데 있다. 그 뿐인가 질식할 수밖에 없는 공간 속에 몸담고 있으면서 그 사실 자체마저 인식하지 못하는 불감증 환자가 많다는 것은 더욱 더 큰일이다.
주전 587년 바벨론에 의해 패망한 남왕국 유다의 왕족과 귀족과 엘리트 그룹이 포로로 끌려갔다. 그 가운데 특히 아름답고 흠이 없고 재능과 지식과 학문에 능한 엘리트들은 바벨론 왕의 배려로 특수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다니엘은 국무총리로 출세하는 그 날까지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았다. 그가 다른 각료들의 질투로 사자굴에 들어가게 됐을 때도 그는 신앙의 지조를 꺾지 않았다. 극히 사소한 불이익 때문에 교회를 등지고 예수를 떠나는 사람들에 비할 때 다니엘은 우뚝 선 신앙이 봉우리였다.
그는 박해자의 감시의 눈길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감사하며 기도했다. 다니엘이 열었던 창문은 용기와 고백과 공개의 창문이다. 그리고 일사각오의 신앙이 아니면 불가능한 처신이었다. 창문을 열 때 은혜와 축복의 바람이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은 자연풍의 이치와 다를 바 없다. 만일 그때 다니엘이 일시적인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한 나머지 창문을 닫고 적당한 선에서 묵상기도로 대체했더라면, 그리고 청년 시절에 주어졌던 왕의 진미와 포도주로 자신의 몸을 보신했더라면 그는 사람이 바라는 지도자 정도로 출세는 했을지 모르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지도자는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재빠르게 현실과 영합하고 필요하다면 조금 전까지 열어두었던 창문을 닫아버리는 사람들이 정치, 종교 지도자로 행세하는 것은 다니엘의 눈으로 조명한다면 가관이다. 영혼의 창문을 열어야 이웃과의 참된 만남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닫힌 창문으로는 영원한 세계도 보이지 않고, 이웃도 역사의 흐름도 보이지 않는다. 꼭꼭 닫힌 창문을 여는 것이 우리들의 급선무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대로 하루 세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