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신교회 원로
서울 근교 신도시에 개척을 시작한 목사가 있었다. 친가와 처갓집의 도움으로 상가 지하를 임대하고 매달 생활비 역시 양가와 친구 교회들의 도움으로 메우고 있었다. 개척 2년이 지났지만 회집 수는 가족을 합해 50여 명을 넘지 못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빚을 내서 버스를 사아겠다고 했다. 1층과 3층에 다른 교회가 입주해 있는데 버스를 통원해 교인을 실어 나른다는 것이다. 자기네 교회를 다니던 교인 중 몇 사람이 버스 때문에 교회를 옮겼다는 것이다. 결국 그 교회는 문을 닫고 목사는 지방으로 내려가야 했다.
버스 운영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최대한 교인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오가는 길을 도와주는 것은 형편만 허락된다면 문제될 게 없다. 문제는 빚을 내 버스를 사야 하는 경쟁현실과 교인 뽑아가는 비윤리다. 옆에 있던 교회가 문을 닫거나 떠날 때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목회윤리가 그립다.
이민 목회자와의 대화가 떠오른다. A목사는 미국 서부에서 30년째 이민 목회를 하고 있었다. 한국 목회도 다를 바 없지만 이민 목회는 그 현장이 척박하다면서 들려준 이야기다. 이민 목회 초기 교인 하나는 천금보다 귀했다. 한국에 있는 친구 목사로부터 자기네 교회를 출석하던 아무개 집사네가 이민을 가는데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아무개 집사네가 공항에 도착하는 날 마중을 나갔다. 집사부부와 아이들 3남매 다섯 식구였다. 목사 사택으로 데리고 가 머물게 했고 먹이고, 재우고, 집 찾아 마련해주고, 전화 연결해주고, 아이들 학교 찾아주고, 그들이 목사 집에 머문 기간은 한 달이 넘었다. 교인 다섯 명이 불어난 기쁨 때문에 모든 불편을 감수했다. 그들이 머무는 동안 입만 열면 “목사님,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교회 충성으로 보답하겠습니다”를 되풀이 했다
목사 사택을 떠나 자기 집으로 이사하고 자동차를 구입하고 커피숍 운영을 시작하기까지 1년여 세월이 흘렀다. 1년이 지난 어느 주일부터 얼굴이 보이지 않고 연락이 끊겼다. 알고 보니 집 근처 교회로 옮겼다는 것이다. 곧바로 찾아갔다. 그러나 아무개 집사 대답은 “은혜 있는 교회로 가겠다”였다. 돌아오는 길에 목사는 배신감과 울분을 억누르지 못해 엉엉 울었다.
이런 일을 십여 차례 겪고 난 후 그가 터득한 목회 원리가 있었다. 그것은 개문목회였다. 들어오는 문도 열어 놓고 나가는 문도 열어 놓는 목회다. 그 이후에도 속이 아리고 아픈 일도 있었지만 도를 터득한 도사처럼 이전보다 훨씬 마음이 편해졌다. 그는 개문목회의 장점을 통풍과 소통이라고 했다. 제멋대로 들어오고 알아서 나가면 통풍이 잘되고 소통이 원활해 좋다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교인은 천금도 만금도 아니다. 그렇게 다루면 안 된다. 목사의 천만금은 예수 그리스도여야 한다. 교인은 교인일 뿐이고 사람은 사람일 뿐이다. 그들을 좋은 교인으로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목회다. 목회를 목양이라고도 한다. 양을 키우는 행위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온갖 정성과 기능을 쏟고 비법을 동원해도 양이 소가 되고 금덩어리가 되는 경우는 없다. 양은 양이 될 뿐이다. 그런데 목회자의 착각은 양을 키우면 소가 되고 황금 덩어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저질렀던 황금송아지 숭배의 잘못에 빠지게 된다.
완주자의 노래, 멋진 마침표
지인은 많다. 그러나 친구는 지인의 숫자에 비해 적다. 지금 한국 교회가 겪고 있는 위기는 안과 밖으로 대별된다.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위기는 동기도 발상도 내적 요인에서 비롯된다, 누가 위기를 만들고 있는가? 위기 제조공장이 따로 있는가? 아니다. 나 때문에 위기가 생성되고 증폭되고 있다. 나는 원인 제공자가 아니고 그 누군가 다른 사람 때문에 위기가 왔고 커지고 있다는 오판의 늪에 빠져 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사건 중 주목할 것은 ‘핑계’다. 핑계가 뭔가? 그것은 떠넘기기다. 떠넘기기 바이러스는 오늘도 각 분야에 침투되고 있다.
09/28/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