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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와 성경공부(상)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원로)

한국교회 성경공부운동은 교회 밖의 성경공부와 교회 안의 성경공부로 대별할 수 있다. 교회 밖의 성경공부운동은 선교단체나 학생운동단체들 중심으로 진행되고 교회 안의 성경공부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예를 들면 무교회주의 운동가들의 성경공보, 대학생선교회, 네비게이토선교회,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예수전도단, 직장선교회, 기독실업인회 등 교회 밖의 성경공부가 확산되는 추세였다. 그러나 교회 안의 성경공부는 여러 가지 한계를 넘지 못한 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성경공부운동을 교회 안에서 활성화하고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필자의 고민이었고 최대 관심사였다. 그것은 말씀과 성령, 지성과 영성을 아우르는 균형 목회를 지향하는 필자의 목회철학 때문이기도 했고, 교회는 성경공부를 통해 건강해졌고 성장했다는 역사적 고찰 때문이었다.

성경공부의 역사

성경공부는 유대 공동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가정 중심의 비형식적 성경공부로 시작된 저들의 교육은 회당의 출현으로 발전되었고 출애굽기, 레위기, 신명기, 전도서, 잠언 등을 단편적이긴 하지만 교재로 삼고 가르겼다.

회당에서의 성경공부는 6세에서 10세 사이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초등학교, 10세 이상의 소년과 장년은 중등학교 그리고 최고학부인 전문학교로 나누어 가르쳤다. 회당예배는 기도와 성경읽기 그리고 성경강해가 포함되었고, 질의문답과 요리문답식을 병행했다. 이러한 유대 공동체의 뿌리에서 기독교가 발생했고, 예수와 그의 사도들 모두 성경의 사람들이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의 복음 전파 사역이 90회 정도 나온다. 그중 60회는 가르치는 일이었고 30회 정도는 설교였다. 그리고 90회 모두 성경(구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고 접근이었다. 초대 기독교의 터를 굳게 하고 발전시킨 힘은 바로 성경공부였다. 바울도 가는 곳마다 성결을 가르쳤다. 예를 들면 베뢰아에서(행17:11), 두란노 서원에서(행19:9-10), 로마에서도(행28:23-31) 성경을 가르쳤다. 이러한 성경공부 전통은 고대기독교로 전승되어 세례준비학교와 문답학교가 세워졌고, 훗날 감독학교와 성당학교로 발전했다.

문제는 중세였다. 흔히 중세 천년을 암흑기라 부른다. 왜 암흑기였는가? 복음의 능력을 상실한 시대, 교권이 교회를 짓누른 시대였기 때문이다. 왜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렸는가? 그것은 성경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교권과 제도가 낙진이 되어 성경을 덮었고, 성직자들만을 위한 증빙전일 뿐 교인들은 성경의 존재마저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성경을 박물관 골동품, 소장품 정도로 취급했다. 성경공부의 빛이 꺼진 중세교회, 그 어둠을 헤치고 성경이 빛을 발하도록 나선 사람이 마틴 루터였다. 성경공부는 종교개혁의 원동력이었고 구심점이었다. 수많은 개혁자들, 츠빙글리, 불링거, 칼빈, 부처 등 모두 성경의 사람들이었다. 그 후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난 경건주의운동 역시 그 뿌리와 동기는 성경공부에서 비롯되었고, 모라비안운동의 친첸도르프 역시 성경공부의 사람이었다. 성경공부운동은 영국으로 건너가 꽃을 피웠고, 미국에서도 교회다움의 교회를 세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영국의 경우 산업혁명의 회오리에 밀려 요동치고 있었고 미국은 합리주의와 도덕적 타락이 맞물려 벼랑으로 치닫고 있었다. 거기다 남북전쟁 이후 사회적 혼란은 신앙적 각성을 강력히 요청하고 있었다. 영국 대각성운동을 견인한 사람들은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 그리고 휫필드였다. 그들은 대학 시절 홀리클럽을 중심으로 기도생활과 성경공부에 주력한 성경의 사람들이었다. 미국의 경우 웨슬리 형제와 함께했던 휫필드, 피니, 무디 등 모두 성경공부의 무리들이었다. 중요한 것은 한국의 경우다. 대동강에서 순교한 토마스는 영국의 대각성운동의 열매인 런던선교회 파송선교사였고, 만주에서 서상륜과 함께 한글로 성경을 번역한 맥킨타이어나 존 로스는 자유연합교회 선교회 소속이었다. 그리고 언더우드나 아펜젤로 선교사는 무디 말년에 심혈을 기울인 학생자원 선교단체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로서 성경공부의 열매들이었다. iamcspar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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