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경우 자의 반 타의 반이긴 하지만 맡은 일이 많았다. 목회자의 텃밭은 교회목회라야 된다는 것이 평소 지론이었고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그러나 동서남북을 차단한 채 오로지 목회만을 고집할 수 없는 것이 필자의 목회 정황이었다. 그때마다 목회란 굉장히 포괄적이고 광의적이어서 대회활동도 소홀히 해선 안된다는 생각을 내세우곤 했다. 그리고 늘 우선순위를 정하고 균형을 잡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대외활동의 원칙
수를 셀 수 없는 교회 밖의 직임들을 맡았지만 언제나 교회목회 다음에 두었다. 그 어느 것도 교회 일을 제쳐 둔 채 올인하지 않았고, 대회활동 때문에 목회를 소홀히 하거나 틈새가 벌어지지 않도록 갈무리했다. 목회자는 누구나 교회 밖의 대외활동을 할 수 있고 안 할 수 없다. 이때 목회가 ‘주’라면 대회활동은 ‘객’이다. 주객전도 현상이 벌어지면 안된다. ‘객’을 ‘주’로 삼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솔직히 그네들의 행태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것은 ‘언제 목회를 하나? 언제 기도하나? 언제 성경연구하나? 설교준비는 언제 하나?’ 걱정스럽다. 총회 본부를 기웃거리는 사람들, 연합기구 주변을 맴돌거나 드나드는 사람들, 그들 대다수는 할 일도 없이 일과처럼 반복한다는 것이 사무실을 지키는 사람들의 공통표현이다. 그리고 그네들 때문에 업무에 지장이 많다고 말한다.
자랑 같지만 이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교단총회를 섬길 때 공식회의가 있는 날 외에는 총회본부에 나간 일이 없다. 본부 안에 총회장의 휴식이나 숙박을 위한 방이 마련되어 있어서 언제라도 머물 수 있지만 단 한 번도 그 방에 머물거나 숙박한 일이 없었다. 그리고 총회장을 위해 책정된 여비나 판공비를 단돈 1만원도 쓴 일이 없다. 총회재정을 축내고 내 돈처럼 쓰는 사람들은 총회 일을 맡으면 안된다는 것이 필자의 소신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맡고 있는 대학 이사장이나 언론사 이사장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대학 이사장직을 10년 동안 맡고 있지만 법인카드나 판공비를 쓰지 않았고, K신문사 이사장직을 6년간 맡았지만 회사 돈을 판공비 명목으로 쓴 일이 없고 법인카드도 사용하지 않았다.
내 것인 양 펑펑 쓰다가 도마 위에 오른 사람도 있고, 구설수에 오르내린 사람들도 있다. 내 것과 네 것,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구분 못하면 누구라도 구설수에 오르내리고 덫에 걸릴 확률이 높다. 필자가 교단 부총회장으로 피선된 것은 55세 되던 해 9월이었다. 지방에선 H목사님이 필자보다 이른 나이에 부총회장이 되었지만 서울에선 없던 일이었다. 두 번 세 번 피선되는가 하면, 예순을 넘어 일흔 정년 은퇴를 앞둔 사람들이 당선되는 것이 관행화 되고 있었다. 그런데 필자가 55세에 부총회장이 된 것을 두고 기적이라느니 관행을 깼다느니 말들이 많았다.
부총회장 후보로 나서기 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몇 사람의 지인이나 선배들을 만나 출마해도 되는지, 당선 가능성은 있는지 자문을 구했다. 결과는 대부분 긍정적이었고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약속도 받아냈다. 그러나 정작 선거운동이 시작되자 넘어서야 할 산맥이 의외로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당시 상대는 S노회 H목사님이었다. 학벌이나 경륜이 필자보다 탁월한 분이었고, 노회나 총회 배경도 높았고, 나이도 필자보다 위였다. 그런데 고마운 것은 동서남북 사방에서 선후배와 동역자들의 격려 전화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걱정하지 말아라”, “적극적으로 돕겠다”, “이곳은 내가 책임지겠다”는 요지의 전화들이었다. 그들이 왜 필자를 돕겠다고 나섰을까? 그것은 작은 정성이지만 20여 년 동안 선후배 동역자들을 돕고 섬겼기 때문이다. 미자립교회를 돕고, 자녀들 장학금을 마련해 지급하고, 시골교회 전도사님들에게 신학수업의 길을 터주고, 학비를 지급했다. 부흥회 사례를 받으면 그 자리에서 건축헌금으로 헌금하고 자녀들 학비에 쓰도록 되돌려 주곤 했다. 이런 일 저런 일로 인연의 줄을 잇고 교제하던 사람들이 각 지방과 노회에서 중견 지도자 되었고, 그들이 자기 일처럼 빚을 갚겠다며 나선 것이다. 천군만마의 원군을 사방에서 얻게 된 것이다. iamcspark@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