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원로)
회의, 의견 조율을 위한 장
회의란 다수결을 근간으로 삼을 때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 소수 의견일수록 존중하고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된다’며 다수결 원칙을 외면하고 아집과 고집과 생트집으로 일관하려는 소수자 내지는 특정인이 있다면 그야말로 민주적 시민이 아니다. 어떤 의제를 결정하려고 할 때 특정인이나 특정 그룹과의 사전 조율은 바람직한가? 언제나 문제는 두 가지 때문에 일어난다. 하나는 실세임을 과시하고 힘을 구사하려는 특정인과 그를 에워싼 사람들의 부정적 역학이다. 혼자의 힘이 약하다 싶으면 힘을 모은다. 그리고 그 힘으로 의사결정 방향을 회전시키려 든다. 이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개인을 만나 타협하거나 조율을 제안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차선위반을 인정하는 것이어서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일이 관행화되면 그들은 쾌재를 부를 것이고, 매사에 그런 행동이 반복되기를 바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뒷거래를 통해 해법이나 접점을 찾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쏠림 현상이 고착되면 다른 쪽에서 전혀 예기치 않은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특정인이나 그를 에워싼 그룹과의 사전 조율이나 타협은 피하는 게 좋다.
두 번째는 평소 자신이 따돌림 당하고 있다는 소외자들의 문제다. 그들은 의사결정 내용이나 경중에 상관없이 구경꾼의 자리에 선다. 그러다가 자신의 입을 열어야 된다는 판단이 서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부정적안 쪽의 편을 들게 된다. 교회란 다양한 편차를 가진 사람들의 집합공동체여서 개인이 따돌림 당한다든지 직무에서 소외당할 수 있다. 이럴 경우 ‘일할 만한 사람이 일하는 것이다’라며 힘 있는 사람들 쪽으로 결정과 역할이 쏠리다보면 소외자들에겐 상처가 된다. 그리고 그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채 나이테가 두꺼워지게 되면 그들은 반대와 부결 쪽에 손을 들게 되고 자신이 당한 소외 감정을 터뜨리게 된다. 그런 면에서 교회 섬기는 사역에 편차나 차별을 둘 필요는 없다.
교회 일이란 반드시 저명인사나 전문가여야 할 이유도 없다. 예컨대 교회재정운영이나 관리팀을 구성할 때 은행 총재나 은행장, 지점장이나 경제학 교수들로 팀을 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전문가들이 비전문자들의 열성과 책임성을 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교회는 섬김과 역할의 소외계층이 많아지면 좋지 않다. 교회 일은 경우에 따라선 능력과 경험, 전문성과 노하우보다 신앙과 충성, 성실과 책임, 정직과 순종이 더 값진 사역의 자산이 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교회는 이 일 저 일로 섭섭한 사람이 많아지면 좋지 않다. 상한 감정이 언덕처럼 쌓이면 넘어서기 어려운 산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경우 가급적 토요일 저녁 회의는 피했다. 주일 준비를 위해서이기도 했고, 행여라도 회의 과정이나 결과 때문에 마음이 상하게 되면 주일 예배는 물론 설교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었다. 설교자가 자신의 감정 조절에 실패하고 설교 속에 감정이입의 틈새를 만들면 그 설교는 흔들리거나 공격적이거나 해선 안 될 말을 쏟아 내게 된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한 시간 내외로 제한하고 회의는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2-3일씩 연장한다.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회의는 짧을수록 좋다. 그렇다고 회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평소 필자가 지킨 몇 가지 원리가 있다.
잡음 없는 회의 원리
1)정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교회도 목회도 그리스도이신 주님이 주인이시고 주역이시다. 모든 회의 역시 예수님이 의장이시다. 당회장도 당회원도 교회 주인이 아니다. 그렇다면 담임목사인 당회장 자신부터 정도를 벗어나면 안 된다. 제아무리 필요한 안건이라도 절차나 의결 과정이 정도를 떠나기 시작하면 반드시 파행과 맞닥뜨리게 된다. 정도란 성경이 밝히는 노선을 말한다. 어느 교회 당회 이야기가 떠오른다. “목사님은 왜 걸핏하면 회의 때마다 성경구절을 댑니까?”라는 당회원에게 “목사가 당회에서 성경구절을 대지 않고 춘향전 구절을 댈까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회의에 임하는 사람들, 담임목사를 포함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이 반드시 관철되어야 한다는 아집을 버리는 게 좋다. 이 일은 주님이 원하시는 일인가? 성경과 맞는가? 그리고 교회에 유익한지를 고려해야 한다. 철저하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가 적용되어야 한다. 정도를 걷는 사람은 수단이나 방법을 동원할 수 없다. 정도 자체가 최상의 방법이며 방편이기 때문이다. iamcspark@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