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원로)
신학교 재학시절 필자의 꿈은 설교 잘하는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야 아무개 목사처럼 대형교회 담임이 될 수도 있고, 노도 같은 인기몰이를 할 수도 있고, 박수갈채를 받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설교를 마치고 현관에 서 있으면 설교에 감동받은 교인들이 반색을 하거나 아니면 울먹이며 “목사님, 오늘 너무나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를 위한 설교였습니다”라며 두 손을 잡는 그런 설교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기도제목이기도 했다. 그러나 철이 들고 목사가 된 후 그 꿈이 얼마나 부질없는 꿈인가를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설교란 다짐한다고 잘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 설교에 도취되어 ‘내 설교가 최고다’ 라고 생각한다든지, 자신이 최고의 설교자라고 자찬하는 것은 일련의 설교 콤플렉스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설교는 쉬운 일이 아니다’ 라는 생각이 필자를 조이기 시작했다. 본질에 가까운 설교를 향한 몸부림 왜 설교가 어려운가? 수십 가지 이유를 나열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언어로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때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언어’이며, 설교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기도는 내 문제, 내 사건, 내 생각을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이어서 자신의 주견이나 생각이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설교는 하나님 말씀의 대언이며 선포이기 때문에 개인의 기교나 경험 그리고 주관이 하나님의 말씀을 추월하면 안된다. 작은 깨달음이지만 이 원리를 이해하고 난 뒤부터 필자의 설교관이 변했다. 그것은 설교는 잘 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해야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잘하는 설교보다 바로 하는 설교가 설교의 본질에 가깝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대다수의 설교자들은 가수가 히트곡을 불러 명성을 얻는 것처럼 명성과 인기를 누리는 설교를 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들은 못할 짓이 없다. 하나님의 뜻과 얼굴을 살피지 않고 설교 대상의 낯을 살피고 분위기를 헤아리고 반응을 저울질 한다. 설교인지 코미디인지, 성경 이야기인지 세상 이야기인지, 복음인지 유머인지 구분 짓기가 애매모호하다. 그것은 설교자가 설교를 보고 듣는 대상만을 생각하고 고려할 때 야기되는 현상이다. 그렇다고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식으로 듣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설교를 독백한다면 그것은 독선이고 무지다. 전달되지 않는 것은 설교가 아니다. 대상이 누구든 설교의 주된 내용이 전달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설교자와 듣는 이들 간의 소통이 성립되어야 한다. 산상수훈에 나타난 예수님의 설교를 살펴보면 듣는 사람들의 이해와 그들과의 소통을 위해 쉽게 그리고 때론 비유를 사용하시곤 했다. 오래전 ‘월간목회’에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설교를 조명한 일이 있었다. 30여 명의 설교자와 그들의 설교세계를 조명한 결론은 ‘복음적이다, 설교가 쉽다, 목회적이다, 설교와 삶의 괴리가 적다, 교회론적이다’ 등이었다. 특히 중대형 교회를 이룬 설교자들의 설교는 하나같이 쉬운 설교였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설교는 소통이 중요하다. 일방통행만으로 설교의 효과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설교는 결과로 말한다는 것이다. 제아무리 기염을 토하고 명문장으로 틀을 짜고 구성했더라도, 온갖 지식을 총동원하고 신학으로 날개를 달아도, 그 설교를 통해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 그것은 잘하는 설교일 수는 있어도 바른 설교는 아니다. 설교는 그 형식에 있어서 듣는 설교와 읽는 설교로 나눌 수 있다. 들으면 은혜가 넘치지만, 읽으면 말도 안되는 설교가 있다. 그런가 하면 들으면 졸리는 설교인데, 읽으면 수려한 문장과 짜임에 정신이 번쩍 드는 설교가 있다. 두 가지 요소를 다 갖출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날 그 자리에서 듣고 감격하고 회개하고 결단하는 설교가 생동하는 설교다. 목회는 정년이 있고 은퇴가 있지만, 설교는 정년도 은퇴도 없다. 고인이 되신 방지일 목사님은 104세까지 전 세계를 누비며 집회를 인도하고 설교를 하셨다. 필자 역시 목회는 내려놓았지만 설교의 기회는 셀 수가 없다. 그리고 담임목사의 자리를 떠났기 때문에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한결 자유로워졌다. iamcspark@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