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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목회를 하고 싶다(상)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원로)

뒤늦게 철이 들어서일까? 목회를 내려놓고 난 지금, 깨달음도 많고 후회도 크다. 이런 일은 이렇게 했더라면, 저런 일은 저렇게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더 잘됐을 텐데 하는 생각이 솟곤 한다. “인생은 미완성”이라는 노랫말이 떠오른다. 목회도 완성이 없다. 지나고 나면 만감이 오가고 떠오르는 게 많다. 그런 면에서 이 글은 필자의 반성문이기도 하고 회고의 글이기도 하다. 이런 목회를 하고 싶다.

낮춤목회

필자의 경우 겁 없이 덤비고 설칠 때가 있었다. 그리고 한껏 꿈에 부풀어 높낮이도 구별 못하고 전후좌우도 돌보지 않은 채 가속 페달을 밟아댔다. 내가 제일이고 내 목회가 최상의 모형이고 내가 해야 된다는 오만으로 들떠 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비전과 오만은 동급이 아니라는 것이다. 호위 받고 박수 받는 황제 목회가 부럽고 ‘나한테도 그런 기회가 오겠지’라는 망상에 빠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꿈을 버리고 비전도 포기한 채 비굴한 처신을 해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필자의 소신은 목사의 자존심은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의미 없이 굽실거리고 줏대 없이 알랑대는 것은 가치가 없다.

포장된 겸손은 겉꾸밈에 불과하다. 차라리 솔직한 교만만도 못하다. 자신의 부정직하고 은폐된 삶을 굴절된 겸손으로 포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건 오래 못간다. 사실과 실체가 금방 드러나기 때문이다. 말이 그렇지 표리가 같고 언행이 일치된 자기 낮춤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남는 후회가 크고 많다. 베드로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의 세족사건을 한 점 성화로 취급하기 쉽다. 예수님이 그 일을 행하셨을 때 주변을 의식하셨을까? 입소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기대하셨을까? 아니다. 그 일은 순수 그대로였고 섬김의 표본이었다. 손양원 목사님은 나환자들의 피고름을 입으로 빨고 그들의 친구가 되었다는데 아직도 내 안엔 황제 취향의 잔재가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다. 다시 목회를 한다면 나를 낮추고 섬기고 베풀고 싶다. 양들을 위로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목회를 하고 싶다.

무릎 목회

머리를 굴리고 행정의 묘를 살리고 대인관계에 성공하고 기발한 설교와 접근법으로 교인을 감동시키면 성공 목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쪽에 정열을 투자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건 내 목회지 하나님의 목회는 아니다. 은퇴한 아무개 목사님은 해외여행에서 돌아올 때마다 준비한 선물을 당회원들에게 주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새해가 되면 세배도 했다고 한다. 처음엔 ‘황공무지로소이다’라던 그들이 그 일이 반복회자 시큰둥해졌고 결국 반기를 들어 목회자 배척운동을 벌였다고 한다. 목회 대상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들을 사람의 방법으로 다루고 접근하고 장악하려는 것은 금기다.

“내가 사람에게 좋게 하려 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라는 바울의 고백이 무겁게 다가온다. 바쁘다는 핑계, 일한다는 구실, 피곤하다,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하나님께 무릎 꿇는 시간을 소홀히 했다. 하루 서너 시간을 기도했다는 앞선 이들의 기도담을 들을 때마다 ‘아, 나도 그래야지. 그렇게 해야 목회가 바로 되지’ 라고 생각하고 말하면서도 실천하지 못했다.

돌이켜 보면 하나님과 의논 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착상과 접근은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사람을 만날 때도 기도 후에 만나야 하고, 말씀을 전할 때도 기도로 영성 충전 후 해야 한다. 회의보다, 세미나보다, 여행보다 더 큰 것은 목회이고, 목회에 앞서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오래 전 출한사와 잡지사를 운영하는 사람을 만났다. 신간 펴내랴, 매달 잡지 만들랴, 원고수집, 원고료 지불, 출판비, 광고 칸 채우기..... 하루하루 시달리다 보면 헤어나기 어려운 스트레스에 빠져 불면증으로 잠도 이루지 못한다고 했다.

필자는 그에게 “머리로 생각하기 전 무릎을 꿇으라”고 조언했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한마디였다. 그러나 그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잃어버린 기도의 시간과 장소 그리고 기도말을 재정비했다고 한다. 머리 싸매고 고민하는 대신 사무실 콘크리트 바닥에 무릎을 꿇기 시작했고, 1년 후 사옥을 마련하고 운영의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회사뿐이겠는가? 하나님의 목회라면서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한숨짓고 앙탈 부리고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까 두리번거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목회 마침표를 찍게 된 내 꼴이 부끄럽고 한심스럽다. “목사님, 바쁘십니다.” 왜 바쁜가? 무엇 때문에 바쁜가? 나만 그 답을 알고 있다. iamcspar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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