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원로)
신앙교육을 위한 지침 아이의 잘못을 탓하고, 징벌하고, 격정을 참지 못하는 행위는 개선이나 치료를 위한 현명한 접근법이 아니다. 안방에서 있었던 일은 필자와 그 아이만의 사건이었다. 결코 형제들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그 일이 끝나면 꼭 껴안고 기도했고, 반드시 푸짐한 먹을거리를 사다가 뒤풀이를 해주곤 했다. 부모 자식 사이에 증오심이나 적개심이 이입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 그런 정신적 불순물을 차단하지 못하면 부모 자식 사이에 균열이 생기고 사탄이 제공하는 괴리의 골이 깊어지게 된다.
셋째,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가르쳤다. 버스표 열 장을 사면 한 장은 십일조로 드리게 했고, 용돈이나 아르바이트로 번 돈도 세뱃돈도 십일조를 하게 했다. 십일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꼬리를 잇는 사람들이 있지만 십일조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신앙과 감사에 그 뿌리가 있다. 생활비의 많고 적음을 떠나 필자 부부의 경우 10의 3-4조를 드렸다. 그리고 그 신앙과 삶을 자녀들에게도 물려주었다. 어른이 된 자녀들이지만 지금도 십일조 생활을 철저히 지켜 나가도 있다. 왜 복받고 사는 법을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가르치지 않는지 궁금하다.
넷째, 나누고 돕는 삶을 가르쳤다. 이웃을 돕고 섬길 때, 아이들이 동참하도록 했다. 보육시설(고아원)을 방문할 때도 동행했고, 그곳 아이들과 자매 관계를 맺고 정을 나누도록 했다. 목회자는 일생 동안 성도들의 사랑을 먹고 산다.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주기보다 받고 산다. 그러다 보면 주는 것보다 받는 데 익숙해진다. 어느 평신도가 이런 말을 했다. “목사들은 공짜를 좋아한다.” 그 말이 필자에겐 비수처럼 꽂혔다. 식당에선 먼저 밥값을 내고, 택시 타고 내릴 때는 택시비를 먼저 내고, 결혼식엔 축하금을, 장례식엔 조의금을 내는 데 힘썼다.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가르쳤다.
다섯째, 삼사일언(三思一言)을 가르쳤다. 필자는 허풍 떨고 수다 떠는 걸 싫어한다. 그래서 접근하기가 어렵고 차갑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목회자가 살살이처럼 굴고 수다 떨고 허풍 떠는 것은 좋은 꼴이 아니다. 의젓하고 당당한 것이 훨씬 좋다. 가벼우면 미풍에도 요동하지만 무거운 것은 강풍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태풍이 휘몰아치면 가로수는 뽑힌다. 그러나 남산이나 북한산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뿌리가 깊고 덩치가 크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내도, 세 자녀나 사위나 며느리까지도 수다쟁이가 없다. 정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언어를 선별하는 예지를 갖추고 있음에 천만감사를 드린다.
여섯째, 욕심이나 탐욕을 금하도록 가르쳤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것이 욕심이다. 남의 것을 내 것으로 끌어안으려는 것이 탐욕이다. 이 세상에 내 것이 어디 있는가. 그리고 무엇이 내 것인가? 생명도, 건강도, 재물도, 오늘도, 내일도, 교회도 내 것이 아니다.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이 질서가 깨지기 시작하면 추태가 벌어지고 붕괴음이 들리게 된다. ‘욕’은 멀리할수록 좋고, 버릴수록 좋고, 내려놓을수록 좋다. 이 원리를 자녀들에게 주입시키고 가르쳤다. 자녀들이 지금껏 주님 곁을 떠난 일이 없고, 필자의 동역자가 되어준 것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감사와 영광을 주님께 드린다. 가정목회는 학습이나 세뇌로 되는 것이 아니다. 가족이란 24시간 365일을 함께 하기 때문이다. 한 지붕 아래서 한 솥의 밥을 먹고 얼굴을 대면하고 살아간다. 그래서 가족들끼리는 장단점을 숨길 수도 없고 포장할 수도 없다.
교회목회도 그렇지만 가정목회는 ‘어떻게 사는가, 어떻게 행동하는가, 어떤 모습을 보여 주는가’로 판가름 난다. 나는 천사라고 웅변해도 가족들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는 결코 천사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대상이 아무개 목사님이자 우리 아빠라고 한다면 그는 가정목회에 성공한 목회자이다. 그런 목사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