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원로)
원로는 죽어도 원로다 목회 성패를 떠나 20년이나 30년 한 교회를 지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흔적과 자취, 영향력과 숨결이 이곳저곳 배어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후임이 조급증에 걸려 흔적이나 업적을 지우려고 서두르면 반드시 그물망에 걸리게 된다. 원로는 죽어도 원로로 남기 때문이다. 원로목사를 경쟁자나 타인으로 취급하기 시작하면 후임에게 득될 일이 하나도 없다. 영남지방 모 교회 목사가 장기목회를 접고 원로목사가 되었다. 후임으로 40대 젊은 목사가 부임했다. 후임은 원로목사를 아버지처럼 모셨고 원로목사가 사용하던 사무실을 그대로 쓰게 했다. 수년이 흐른 뒤 원로목사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후임은 1년 동안 원로목사가 사용하던 사무실을 그대로 보존했고 그 이후엔 원로목사 기념실과 세미나실로 사용하고 있다. 꼭 그래야 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 일은 후임자 자신의 목회에 결정적이고 긍정적 기여를 했다고 본다. 문제는 내심이며 진실이다. 원로목사가 후임에게 눈엣가시가 된다든지 장애물이 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리고 후임이 원로목사를 가시나 장애물처럼 언행하면 명줄이 짧아진다. 두 관계는 타인이어도 안 되고, 경쟁자여도 안 된다. 로마는 원로원을 중심으로 원로들이 나라를 통치했다. 로마 시대로 회귀할 이유는 없지만 후임이 원로를 홀대하는 것은 바른 일이 못 된다.
인정하라, 그리고 배우라 원로의 목회가 화려한 여정이었다고 그대로 카피할 필요도 없고, 지지부진했다고 해서 무시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전임자의 목회 노하우를 인정하고 배우는 것이다. 그대로 흉내 낼 필요도 없고 무가치한 과거사로 폐기할 필요도 없다. 말이 그렇지 동일 교회를 20-30년간 섬긴 데는 나름의 전략과 노하우가 있었을 터이며, 전수해도 좋을 다양한 접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하루아침에 골동품 창고로 집어넣고 새로운 교회, 새 비전,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는다’라며 서두르다 보면 십중팔구는 스스로 판 함정에 빠지게 된다. 원로의 말 한마디가 후임을 곤경에 빠뜨릴 수도 있고, 긍정적 울타리가 될 수도 있다. 목회에 신에너지를 공급해줄 수도 있고, 타이어에 펑크를 낼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원로는 유감을 버리고 후임은 경계의식을 버려야 한다.
사람을 그리워하라, 그리고 조심하라 목회는 관계로 성립된다. 다양한 계층과 구성원이 포진하고 있다. 일단은 그들이 사랑스럽고 정겹고 좋아야 한다. 목회는 하나님이 위탁해주신 거룩한 사역이면서 그의 백성을 하나님께 올곧게 이끄는 신령한 사역이다. 그래서 목회는 대상이 사람이며 그들을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돌보아야 한다. 그런데 사람이 싫다든지 만남이 불편하다든지 소통이 불통이라면 자아목회는 가능하겠지만 다중목회는 성공하기가 어렵다. 목회 주변에는 별별 사람이 많다. 원로에게 후임 약점을 보고하는 사람, 후임에게 원로의 일거일동을 고자질하는 사람, 그래서 양자 사이를 갈라놓고 득을 챙기려는 사람, ‘아니면 말고’라는 가치관으로 입을 열고 다니는 사람, 사사로운 옛날 기분이나 감정을 이때다 여기고 털어놓는 사람 등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오갈 수 있다.
여기서 원로나 후임이 중심을 잃고 ‘그럴 수가 있는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라며 오해의 실타래를 풀기 시작하면 꼬이고 또 꼬여 결국은 엉킨 실타래를 잘라야 하는 국면을 맞게 된다. 교수들의 세계, 선후배가 분명하다. 의사들이 세계도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의 구분이 명확하다. 군인세계, 그곳은 계급과 서열이 철통같이 지배한다. 원로와 후임도 자기 자리를 찾고 정도를 걸으면 된다. 원로는 후임 때문에, 후임은 원로 때문에 목회은퇴 후의 삶이 평안하고 가속 페달을 밟을 수 있어야 한다. 이중첩자처럼 구는 거짓과 과장과 허위의 전령사는 멀리하는 게 좋다. 지금까지 이야기는 필자의 이야기이며 우리의 이야기다. 정도가 아니면 걷지도 말고 가지도 말고 들어서지도 말자. 그렇게 한다면 탈 없는 목회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