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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로 살아가기(2)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원로)

다 내려놓기 필자가 35년간 섬긴 충신교회는 중대혁교회군에 들지 못한다. 그러나 이곳저곳 필자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교회 본 예배당 외에 유치원, 아기학교, 교육관, 새 성전 부지 등 땅값 비싸기로 소문난 동부이촌동 5군데 부동산이 흩어져 있다. 경기도 마석에 있는 수양관 ‘말씀과 기도의 집’ 6만 여 평, 강원도에 있는 산야 등 필자 재임 기간에 매입하거나 건축한 것들이다. 매매가 어렵겠지만 합산하면 수천억에 이른다.

그뿐인가? 30대 중반 담임목사로 청빙 받고 35년간 삶과 정열을 쏟아 부어 교회를 섬겼다. 1백여 명 정도의 교회가 1백배로 성장하는 은총을 입기도 했다. 그렇게 일군 안방을 어느 날 후임에게 넘기고 담장 밖으로 밀려났다고 생각하면 울화통이 터지고, 아깝고, 서럽고, 밤잠을 설칠 수밖에 없다. 은퇴 후 할 일은 없고, 고독은 밀려오고, 옛날은 그립고 그래서 우울증에 시달리는 은퇴자도 더러 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사고의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 ‘내 돈 주고 매입한 내 땅인가? 내 돈으로 지은 건물인가? 그래서 내 소유인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주님의 것이고 주님이 하셨다. 나는 청지기였을 뿐이다’라고 생각하고 고백해야 한다. 그래야 다 내려놓기가 수월하다. 여기서 꼬이면 은퇴 이후가 자칫 추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분별하기 은퇴 이후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든지 이 일 저 일 앞뒤 가리지 않고 맡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은퇴목사에게 주어지는 일들은 대부분 별 볼일 없는 것들이고 영양가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그런 일들을 마치 감투처럼 여긴다든지 광영으로 생각한다면 득보다 실이 커진다. 그리고 교묘한 접근으로 다가서는 사람들도 경계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그런 아류의 사람들은 아첨배가 아니면 사기꾼이기 때문이다.

간섭안하기 내가 낳고 키우는 자식도 잔소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물며 자리를 떠난 사람이 이래라저래라 간섭하거나 시시비비를 따지거나 잔소리를 늘어놓는다면 누가 그를 반기며 좋아하겠는가? 목회 성패는 후임목사가 져야 할 몫이다. 원근을 가리지 않고 관여하고 간섭하다 보면 마침내 옹벽이 쌓이게 된다.

칭찬하기 “후임이 잘 하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예, 잘하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할 수도 있고, “글쎄요. 잘하고 있겠지요”라든지 “후임 선택을 후회합니다”라고 답할 수도 있다. 누가 선택했든 상관없이 후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칭찬하는 것이 원로나 은퇴목사의 정도다. 잘못해도 잘한다고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이 호통치고 비난하는 것보다 약효가 빠르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모 교회 원로목사는 주일마다 후임자의 설교를 비평하고 주위에 교인들이 서 있어도 개의치 않고 “그걸 설교라고 했느냐”며 다그쳤다고 한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원로목사의 설교도 별로였다는 것이다. 칭찬하면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비난도 마찬가지다.

후임목사의 자리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 후임목사가 걸어야 할 정도는 무엇인가? 우리 시대는 사회윤리가 실종되어 가고 있다. 거친 황야처럼 사람들의 심성이 나쁜 쪽으로 기울고 있다. 교회라고 다를 게 없다. 고소, 고발이 꼬리를 물고 반목과 대립이 활개치고 있다. 선후배나 사제지간의 윤리도 붕괴되어 가고 있다. 큰 교회 담임이 되면 사람도 큰 사람인양 오만을 떠는 사람도 있고, 작은 교회 목회자라며 저항과 오기로 세월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원로목사와 후임목사, 그들은 누구인가? 누구여야 하는가? 선배와 후배인가? 스승과 제자인가? 부자지간인가? 바울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디모데를 “내 아들이라” 호칭했다. 그 둘은 사제지간이었고, 선후배였고, 부자지간이었다. 후임목사가 걸어야 할 정도는 이렇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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