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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와 자존심 (상)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원로)

목자의 삶, 인고의 세월 넉넉한 유산을 물려받지 않는 한 목사가 부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돈도 많고, 교회도 크고, 목회도 잘하는 목회자가 있다고 한다. 그들이 부럽다. 그리고 신기하다. 어떻게 다 갖출 수 있을까?

이왕에 안고 가야 할 가난이라면 갈무리를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정리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부도 갈무리를 잘못하면 가난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진다. 부 자체는 누가 소유하든 악도 죄도 아니다. 그러나 그 부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귀천이 결정된다. 바로 벌어 바로 쓰는 것은 고귀한 부다. 하나님의 나라와 거룩한 삶을 위해 값지게 쓰는 것은 깨끗한 부다. 그러나 목적도 수단도 개의치 않고 협잡의 대가로 이룬 부는 추한 부다. 제아무리 대형 부를 축적하고 재벌이 되었더라도 주색잡기로 탕진하고 이기적 삶을 위해 투자하는 부라면 그 명이 길지 못하다.

필자가 내린 결론은 깨끗하고 당당하게 가난관리를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바울은 부할 때 가난했고 가난할 때 부를 누릴 줄 아는 자유인이었다. 그는 풍유와 비천의 두 세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달인이었다. 교회는 이익 창출을 위한 기업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 돈이 곧 목사 돈이라는 황당한 가설이 성립되지 않는다. 교회는 대형화 하고 예산 규모가 불어나지만 그렇다고 목회자가 무한정 교회재정 운영에 전횡을 일삼을 순 없다. 그리고 언제나 목회자는 ‘가난하다. 청렴하다. 사심이 없다. 투명하다’는 말을 듣는 것이 좋다. 그러나 반대로 ‘사욕이 강하다. 내려놓지 않는다. 흑막이 있다’는 평은 목사가 들어선 안될 말이다.

목사도 많은 돈이 필요하다. 올곧게 쓰고 나눠야 할 곳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을 밝히거나 탐하면 안된다. 거기엔 반드시 유혹과 시험이 올무를 치고 있기 때문이다. 목회 기간 중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 이 경우 먹고살 걱정이 없는 목사는 현장정리가 쉽다. ‘내가 여기 아니면 목회할 데가 없나? 먹고살기 위해 그 수모를 다 견뎌야 하나?’라며 교회 포기가 용이하다. 그러나 그럴 상황이 아닌 목사는 ‘가긴 어딜 가? 여기서 견뎌야지’라고 인고의 씨름을 하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후자였다.

목회를 크게 자아목회, 가정목회, 교회목회로 나눌 수 있다.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지만 대다수 자아목회 실패가 단초가 되어 목회를 내려놓는 사람들이 있다.

누구나 성공할 수 있고 정상에 오를 수 있다. 그러나 그 성공을 잘못 다루면 추락한다. 누구나 실패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실패를 바르게 다루면 기회가 되고 재기와 성공의 출발점이 된다. 이것은 ‘성공학’의 정론이다.

필자는 어린 시절부터 ‘자존심’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가난해도 가난한 티를 보이지 말자. 없다고 궁하고 추한 모습을 보이지 말자’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훈련하고 조종했다. 신학교 재학시절 룸메이트들도 필자가 가난과 싸우고 있다는 것, 하루 세 끼 기숙사 밥을 먹지 못하고 한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궁색한 모습을 보인다고 도와줄 사람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만 초라해진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친구가 퍼뜨린 유언비어는 “박종순이는 안양에 땅이 3만평 있단다”, “부잣집 막내아들이란다”라는 것이었다. 이런 소문이 퍼져 사실 확인을 하려 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웃기는 일이긴 하지만 ‘박종순이는 거지, 비렁뱅이, 제때 등록금 못 내는 사람, 하루 한 끼로 버티는 고학생’이라는 말보다는 훨씬 낫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었다. 물론 불필요한 자존심이어서 자신의 삶을 고달프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생각은 필자의 목회에도 녹아들었다. ‘안 주면 안 먹고, 없으면 안 쓰고, 먹을 것이 없고 쓸 것이 없으면 죽어도 좋다’라는 것이 필자의 자기관리 철학이다.

<“완주자의 노래-40년 목회이야기” 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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