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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사모의 인격 가꾸기(1)

황순원 사모 (CMF사모사역원 원장)

사모의 인격은 다른 보통 여인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모라는 호칭 그 자체는 사모들에게 많은 부담을 주고 있습니다. 사모는 이래야 한다, 사모는 저래야 한다, 사모이기에 다른 여성들과는 무엇인가 달라야 한다. 혹은 미혼녀들 중에 좀 특별히 열심이고 유난히 착하기라도 하면 “사모감이야” “그럼 그렇지” “어쩐지 달라” 이런 말들을 흔히 듣게 됩니다. 어느 누구나 할 것 없이 사모라면 적어도 이래야지 하는 기준이 보이지 않게 서 있습니다. 이런 점들이 실제로는 사모들에게 많은 눌림을 안겨주며 심지어는 헤어 나오지 못하는 수렁에 깊이 빠져 들게도 됩니다. 인격은 반드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그로부터 사명을 받은 자는 이제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나누어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것이 인격입니다. 아무리 실력이 있고 많은 은사를 가진 자라 할지라도 인격이 따라와 주지 않으면 그 열매는 뻔 한 것입니다. ‘조해리의 창‘이라는 이론에 의하면 인간의 자아에는 네 가지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나도 알고 남도 아는 “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이것으로 평가하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둘째는 나는 아는데 남은 모르는 “내”가 있습니다. 사모들은 특히 이런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될 수 있는 한 성도들에게 드러내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긴장을 합니다. 들키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합니다. 자녀들까지도 거룩한 척하지 않으면 구설수에 오르기 쉽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사모들의 스트레스는 심한 병까지 걸리게도 되지요. 한국에 가면 십계명에 한 가지를 덧붙여서 사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남에게 들키지 말찌어다” 이것을 위해 안간힘을 쓰다 지치는 자들이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셋째는 나는 모르는데 남이 아는 “내”가 있습니다. 나 자신이 거울을 드려다 보지 않으면 알 수 없고 다른 사람에 의해 지적을 받게 되는 경우입니다. 사모들에게는 이런 경우 심한 충격을 받는 일도 생깁니다. 얼토당토한 말이 나돌게라도 되면 사모는 억울한 감정에 밤잠을 설치게도 됩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당신을 당나귀라고 부르면 무시해 버려라 그러나 두 사람이 당신을 당나귀라고 부르면 귀를 만져 보라 만약에 세 사람이 당신을 당나귀라고 부른다면 등에 안장을 차라.”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참고하라는 의미입니다. 사모들은 다른 사람과 달리 온갖 구설수에 오를 경우도 있습니다. 성도들의 습관 중에는 성도들끼리 서로 다투다가도 가장 만만한 사모에게 온갖 누명을 다 뒤집어 씌울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이 곤란한 일을 당해서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을 경우에도 가장 만만한 사모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교회를 떠납니다. 그 후유증으로 사모는 밤잠을 설치며 심하게는 우울증까지 걸립니다. 이런 저런 상처를 받은 사모는 자신의 본래의 모습은 어디로 가 버리고 성도들 앞에 또 다른 모습으로 마스크를 쓰고 나타나야 합니다.

처음 목회를 시작할 때는 그래도 제법 순수하고 정직하고 해맑은 얼굴로 웃음이 가득차여 있었지만 오랜 세월 이렇게 시달리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속과 겉이 달라집니다. 그 이유는 희로애락의 표현에 많은 제재를 받기 때문입니다. 우습다고 마냥 웃어도 안되고 때로는 본의 아닌 거짓말도 해야 하는 자리가 사모의 자리인가 봅니다. 마치 양심에 화인 맞은 자처럼 보여질 때도 있습니다. 온갖 상처로 인해 자신의 본래의 모습은 사라지고 살아남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생겨진 자신의 모습은 자신이 스스로 보기에도 한심할 때가 있습니다. 본래의 모습과는 달리 이상한 성격의 소유자가 된 사모가 어느 날 자신을 들여다 볼 때 한심해 보입니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처녀시절엔 안그랬는데... 갱년기라도 될라치면 심한 우울증으로 모든 의욕까지 잃어버리게 되기 쉽습니다.

필자의 경우에 20여년의 사역을 마치는 그 날. 부푼 꿈을 안고 미국에 도착한지 1년 된 어느 날, 하나님은 남편을 불러가셨습니다. 그 날 이후였습니다. 사모의 길을 걸어 온길 20년이 훨씬 넘어선 어느 날, 예고도 없이 홀사모가 되던 그 날을 생각해봅니다. 까마득한 장래를 어찌 견뎌야 할꼬 고민하며 애타하다가 마침내 병이 들어 쓰러지던 그 날, 아무 희망도 보이지 않던 그 날,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멍해집니다. 그러나 엄청난 사실 앞에 서 있는 여인에게 주님은 찾아와주셨습니다. 다시금 사랑의 고백을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던 그 날, 그 앞에 쓰러졌습니다. 잘한다고 생각해 왔었는데... 남달리 충성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일등 사모가 되려고 달려왔었는데... 주님은 저의 영안을 열어서 저의 인격에 병든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성도들과 남편목사님을 지적하는 형사병, 심한 상처로 찌들어 있으면서도 증세를 모르는 감각 없는 문둥병,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사랑하는 척하는 척병 등등 온갖 인격의 병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랑하신다고 고백하시는 주님 앞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통곡과 회개의 울음소리가 기도원의 적막을 깨뜨리고 새로운 충성을 각오하게 하였습니다. 사람들 앞에 서기가 부끄러웠습니다. 이런 사람을 사모라고 사랑해 주셨던 성도들 앞에 무어라고 인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울고 또 울었습니다. 눈물이 강물처럼 흘러 내렸습니다. 회개의 눈물을 받으신 하나님은 새로운 찬송을 입에 넣어주셨습니다. “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중한 죄짐을 벗겨주신 주님의 십자가는 사별의 고통을 이기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네 번째는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내”가 있습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알게 모르게 원하든 원치 않든 상관없이 부모로부터 또는 곁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습니다. 해결되지 않은 상처들을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다 보면 어느 덧 무의식 세계로 옮겨집니다. 이것은 남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식하지 못한다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성숙에 지대한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방해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말씀은 운동력이 있어 이런 부분까지도 터치하셔서 치료해 주시니 오늘도 그 말씀 앞에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까지도 찔러 쪼개임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이메일:hwangsunw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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