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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사모의 인격가꾸기(3)

황순원 사모 (CMF사모사역원 원장)

목회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돈, 명예, 성” 이 세 가지만 철저히 관리하면 된다고 부모님으로부터 귀가 닳도록 들었습니다. 그러기에 목회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려고 애를 써왔습니다. 집도 아주 싼 값에 구입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지만 목회자는 집이 있으면 안된다는 아버지의 철저한 교훈 때문에 집도 사지 않았던 때가 생각납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났어도 자녀들을 교육시킬 경제조차도 계획하지 않은 채 마냥 헌금하기에만 급급했습니다. 자녀들의 학비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못한 채 자녀들은 이미 다 커 버렸습니다.

고생하며 정부 빚을 얻어가며 공부한 자녀들은 이런 엄마를 가리켜 바보라고까지 합니다. 그러기에 나는 돈에 욕심이 없는 아주 신실한 크리스천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달라스로 이사 온 후 친구 목사님 댁을 초대받아 방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삼층집을 손수 지어서 으리으리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미국에 와서 무엇을 했나, 남들 주택 마련하는 동안 무엇을 하고 지냈을까 생각하니 갑자기 초라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더욱이 나를 무겁게 한 것은 그동안 보이지 않던 남의 집이 왜 그리도 근사하게 보이며 동시에 내가 살고 있는 집이 왜 갑자기 초라해져 보이는지 그것이 당혹스럽게 하였습니다. 집이나 돈이나 명예나 권력까지도 초월하고 사는 아주 근사한 크리스천인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세속적인 크리스천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 되는 순간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살면서 재물에 대한 나의 자세는 무엇이었던가, 욕심이 없는 척한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속고 속이면서 살아온 것인가, 그토록 신기한 기적들을 많이 체험했으면서도 세상의 것 모두 초월한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음을 알고 나니 기적을 체험했다고 인격이 한순간에 변하는 것이 아님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도 세상에 계실 때 기적을 바라는 제자들에게 요나의 표적밖에는 더 이상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셨던 말씀의 의미를 알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사모들의 상담 중 재정에 대한 내용이 많았습니다. ‘사모가 직장생활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요?’ 라는 질문이 많았습니다. 과거에 비해 지금은 그런 질문하는 사모들은 점점 줄어갑니다. 너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세대가 된 것이지요. 이미 목회형편이 사모가 직장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므로 당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교회재정이 안정이 되었어도 사모는 직장을 포기하기 어려워 계속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노후대책을 위해서라도 해야 하고 교회사례비에 여념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점 때문에 자연스럽습니다. 더욱이 은퇴할 준비라면 누구나 재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목회한지 10년, 20년이 흘러 교회를 떠날 때 아무것도 없다면 그 목회자부부는 얼마나 불쌍하고 초라하게 보일까요? 그러기에 요즈음엔 은퇴준비를 위해 미리 선교지를 정해 놓고 재정후원을 확실하게 보완하는 것이 우선이 되었습니다.

사모들은 홀사모가 될 것을 우려하여 생명보험이라도 들어두라고 강조하기도 합니다. 자녀들의 장례를 준비하는 것이 부모로서 당연한 임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지 못한 목회자들은 마치 성공하지 못한 사역자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가르침은 청빈이었습니다. 가난한 개척교회를 할 당시에도 자녀들 교육비보다는 고아들을 돕는 일에 더 앞장섰습니다. 교인가운데 부모 없는 청년들에게 주머니를 털어주기도 하였습니다. 그 청년이 성장하여 교회를 떠났어도 아버지는 그의 경조사에 늘 찾아가서 축하해주기도 하며 위로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택에 방문이라도 하면 자녀들이 벗어놓고 학교 간 동안 집에서 입는 옷가지들을 몽땅 그들에게 주기까지도 하셨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와서 옷을 갈아입으려고 하면 옷이 없습니다. 어디에다 두었냐고 묻기라도 하면 아무개가 와서 주었다고 하시는 어머님의 말씀에 우리들은 아연질색하기도 하였습니다.

30년 목회를 한결같이 하시다가 은퇴할 때도 얼마나 깨끗하게 하셨는지 많은 세월이 흘러간 오늘에 이르러서 돌이켜보면 아버지의 청빈한 목회사역이 못내 자랑스럽습니다. 열한번 째로 태어난 막내 동생이 아버지의 사역을 이어 받아 지금도 욕심 없는 청빈한 목회를 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우리 가정에 자랑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목회자로서 돈에 대한 생각은 몸에 배지 않았던 자로 생각했었기에 더욱 놀라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경제의 고통이 지긋지긋한 나머지 나도 모르는 순간 새삼스레 멋진 집이 눈에 들어 왔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다시금 스스로 정리해봅니다. 아버지로부터 받아온 교훈이었을 뿐 이것이 나의 인격 자체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라면 누구에게든지 다 있는 욕심이 나에게도 있음을 인정하기조차 싫었던 나의 속물속성을 나 스스로에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 고백하고 인정하는 순간 오히려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롬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못한 자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나니” 8절에는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나니” 10절에는 “우리가 아직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그렇습니다. 우리의 죄성은 우리를 항상 주눅 들게 만듭니다. 인격을 운운할 때마다 부담스러워지곤 합니다. 그러나 위의 세 구절은 우리로 하여금 자유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한때는 기적을 체험하고 세계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부흥사로 이름을 날렸던 목회자들도 결국은 돈 무더기에 눌려 자녀들까지도 비참하게 추락하는 광경이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불신자들이 오히려 크리스천들을 염려해주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6.25전쟁 그 이후 가난과 배고픔의 한이 그렇게 만든 것일까요? 교회성장과 함께 부어진 물질의 축복 때문일까요? 목회자가정의 가난으로 한이 맺혀있던 것으로 자녀들에게 물려줄 재산에 관심을 기울이게 할 수밖에 없다는 합리적인 원인이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청빈함을 가르쳐주고 가신 부모님이 떠나고 없는 현실에서 새삼 내안에 꿈틀거리는 욕망을 바라봅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부득이 받아드리려고 애를 쓰면서 말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이 주님을 만난 후 ‘만삭되지 못한 나’라고 고백한 것과는 달리 모든 사역을 마치고 죽음을 앞에 놓고 고백한 말이 생각납니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니라” ▲이메일:hwangsunw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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