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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의 쓴 물에 던져진 한 나뭇가지 (출애굽기 15:22-27)

장성철 목사 (보스턴장로교회)
장성철 목사

(보스턴장로교회)

인간은 발전을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면 재정적으로 경제적으로 삶이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대하던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망을 넘어 절망하고 맙니다. 그런데 진정한 발전이란 사람의 심성이 얼마나 아름다워져 가고 있는지, 그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사회가 얼마나 건강하고 활기에 차 있는지, 또한 정의롭고 평등한 공동체적 삶이 이루어지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지난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우리의 변화를 돌아보면 참 놀랍지만, 그 변화의 속도와 크기에 비해서 우리의 정신은 오히려 남루해져 가는 것을 발견합니다. 정신적 황폐함이 심해져 가서 정신의학과 상담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줄지어서 전문가와 약속을 잡으려고 수개월을 기다립니다.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사회, 미래에 대한 열정이 식은 나라, 의로움에 대한 집단적 의지가 결여된 사회는 매우 풍요한 듯 하지만 실제로는 빈곤하고 '목마른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 사회는 집단적인 정죄가 난무하는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책임을 전가할 희생양을 골라서 난도질하고 사회적으로 매장하다 못해 진짜 죽여 버리기도 합니다. 정치는 이런 현상을 이용해서 정적을 제거하고 죄수로 만들어 버립니다. Chat GPT같은 생성형 AI 등 지식은 넘쳐나는데 그 지식은 사랑과는 점점 상관이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는 지식과 주장은 공격적이고 이기적이며 매정합니다. 힘이 있는 자들은 누군가를 지목하여 모두의 사냥감이 되게 합니다. 그러면 이런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노예로 살아왔던 히브리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애굽의 막강한 체제의 근본이 뒤흔들려 마침내 탈출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애굽에 내리신 '열 가지 재앙'은 애굽의 왕 바로를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체제가 내부에서부터 붕괴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해방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개구리, 이, 파리, 메뚜기 같은 미물의 집단적인 공격, 그리고 마침내 체제의 승계권을 가진 바로의 장자가 죽게 되면서 절망 가운데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해방의 기쁨을 목격하고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한 나라는 주권과 백성과 땅의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집니다. 나라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고, 약속의 땅을 떠난 하나님의 백성들이 노예로 있다가 이제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는 이야기가 출애굽기인데, 죄와 악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노예처럼 살던 하나님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힘을 자랑하는 자들의 오만한 체제에 대한 하나님의 단호한 심판을 통해 패배와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나라의 의로운 힘과 능력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확신의 과정은 앞에 가로막은 홍해와 뒤에서는 애굽의 군사들이 쫓고 있는 진퇴양난의 상황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런 위기에서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으로 광야의 안전 지대로 들어서게 됩니다. 마치 예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의 안전한 보장지대로 들어서게 된 우리와 같이 말입니다. 이로써 위기는 일단락된 것일까요? "모세는 이스라엘을 홍해에서 인도하여 내어,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라는 22절을 읽으면서 건너기 전 앞에 가로놓인 홍해는 죽음의 바다였으나 일단 건너면 누구도 쉽게 뒤쫓아 범할 수 없는 강한 요새가 된다는 점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이 바로 이 요새입니다. 하지만 안전지대라고 안심했던 광야에서 현실은 새로운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구원 그 이후에도 현실은 진정한 발전을 위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훈련의 과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 안에 무엇이 있어야 진정한 성화, 신앙의 발전을 경험할 수 있는가?" 출애굽기 14장 21-22절에 보면 뒤에서는 바로의 군사가 쫓고 있었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는 백성들 앞에 가로막고 있던 홍해가 갈라집니다. 순식간에 갈라진 것이 아니라 밤새도록 강한 동풍이 불어 바닷물이 물러갔습니다. 밤새도록 싸우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모세의 바다를 향해 내밀어 들려진 손을 통해 십자가에 들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손을 봅니다. “밤새도록”이란 십자가의 죽음에서 부활의 승리가 있기까지 시간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장엄한 역사가 이루어지는데 “밤새도록”이란 시간이 요구되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들려진 그리스도의 손으로 우리 내면의 홍해가 갈라져 구원의 길을 내신 장면과 연결하게 됩니다. 이제 살 길이 열렸습니다. 홍해를 마른 땅으로 밟으면서 건너 수르 광야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모세와 미리암의 노래를 통해 감격과 은혜로 자신감에 넘쳐나서 이제 무엇을 더 두려워하겠는가 하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추정해 봅니다. 그런데 사흘 동안을 걸어 광야를 지났지만 마실 물이 없습니다. 홍해를 건너기 전에는 물이 넘쳐서 문제였고, 이제는 물이 없어서 곤란한 지경에 처했습니다. 그러던 중 다행히도 물이 있었습니다. 모두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의 순간도 잠깐, 그 물은 써서 마실 수가 없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습니다. 본문 "마라"의 쓴 물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나 했다가 어디를 둘러보아도 암울한 구원의 감격을 지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24절)라고 아우성쳤습니다. "마라"라는 곳에 온 모든 백성은 다른 방도가 없다고 단정하고 포기한 것입니다. 물이 쓰다는 현실에서 밤새도록 싸우신 하나님이 구원하신 자신들의 현실을 부정했습니다. 그래서 불평하는 일에 몰두합니다. 이런 상황을 가져온 책임을 물어 누군가를 비난하는 일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마치 우리 사회의 모습과 너무 흡사합니다. 홍해를 건넌 감사는 어느새 말끔히 사라지고, 거칠고 험한 말로 희생양을 찾습니다. 물이 쓰면 어떻게 그 물을 달게 해서 마실 방법은 없을까 하고 지혜과 능력을 구하며 모여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이 사건 후에 하나님이 성막과 성전에 모여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 앞에서 예배하며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 아닐까요? 홍해를 건넌 감격과 찬양이 지금 당면한 현실을 해결하는 능력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큰 고비를 넘기긴 했지만 기껏 "마라"가 자신들이 도달할 수 있는 현실의 한계라고 비통해 하며 포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돌파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문제는 물이 없거나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현실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를 결단하는 영혼이 메마르고 비틀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이렇게 인생의 "마라"를 만나게 됩니다. 이만큼 믿음 생활하면서 고생했으면 이제 새로운 현실이 열려야 하지 않겠나 했다가 예기치 못한 난관에 직면합니다. 우울해서 구원의 삶과 믿음 생활을 비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떤 고난과 아픔도 그저 마실 수 없는 쓴 물로 버리게 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이 어지러운 것의 문제는 어지러움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어지러움을 바로 잡을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힘이 없는 것은 황폐함을 새로운 풍요함으로 바꿀 능력을 힘써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능력이 임하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답이 있습니다. 언제 이뤄질 것인지 미리 알 도리가 없어도 그 과정을 잘 통과하면 보이지 않던 것도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말씀하는 믿음이 바로 바라게 되어지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여질 수 없는 것들의 증거를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희망차게 하고, 이것이 우리의 믿음의 행군을 중단하지 않게 하는 저력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을 그 어떤 난관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게 하는 힘입니다. 또한 "마라"에서의 위기는 단지 목이 말라 마실 물이 없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마라”에서 주저앉으면 "엘림"이라는 ‘하나님의 은총이 있는 자리’를 바로 앞에 두고 가지 못하는 뼈아픈 실패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라의 물이 단물이 되어 목을 축여야 하는 보다 중요한 이유는 ‘엘림으로 가는 길’에 우리 영혼의 힘이 쇠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마라는 “엘림”으로 가는 길목입니다. 그 길목에서의 실패는 하나님의 은총의 자리인 “엘림”으로 이어지는 길, 그리고 계속 이러지는 약속의 땅으로 향한 믿음의 여정 전체를 위기에 빠뜨리는 일입니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27절). 풍성한 오아시스라는 얼마나 기막힌 축복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까? 마라의 현실에서 그 답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모세가 한 나뭇가지를 “마라”의 쓴 물에 던졌습니다. 그러자 쓴 물이 달게 변했습니다. 이렇게 쓴 물에 던져진 한 나뭇가지는 주님의 나무 십자가,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십자가 복음, 생명의 말씀을 예표합니다. 포도나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붙어있는 우리들의 나뭇가지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쓰디쓴 현실에 던지면 혼란의 재앙이 아니라 “치료하는 여호와”,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이 구원의 즐거움,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쓴 물” 같은 우리 현실에 필요한 영혼의 능력을 하나님께 구하며 ‘나뭇가지 믿음’의 지혜가 우리에게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schang@bostonkorea.org 08.17.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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