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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3C 혁명 (사도행전 2:38-47)

임수병 목사 (필라교협 회장, 필라사랑의교회)
임수병 목사

(필라교협 회장, 필라사랑의교회)

초대교회 공동체는 성령님의 오심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성령의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1:4) 제자들에게 부탁하셨습니다. 가련한 제자들은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럼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때가 그때냐고,’ 아직도 주님을 정치적인 메시야, 군사적인 메시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이루실 혁명은 ‘군사혁명’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혁명은 소위 ‘성령의 혁명’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그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에 힘썼고, 마침내 주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함과 동시에 적어도 세 가지 회복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세 가지 C로 시작됩니다.

 

Communication, Communion, and Community

 

첫째, 성령이 임했을 때 소통(communication)이 회복되었습니다. 성령이 임했을 때 그들에게 방언을 말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방언은 소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그들이 자기들도 모르는 다른 나라 말을 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이 그것을 듣게 되었는데, 그들은 바대 사람, 메데 사람, 엘람 사람, 소아시아 온 사방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각자의 말로 알아듣게 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함과 동시에 소통이 이뤄지는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소통이 깨지는 사건은 바벨탑에서 시작됐습니다.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은 것은 자기들만의 높은 성을 쌓아서 하나님께로부터 간섭을 벗어나자는 것이고, 흩어짐을 면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그 악함을 아시고,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습니다. 그 결과, 세상은 소통이 막혀버리게 된 것이죠. 하나님 없이 하나가 되려고 했던 인류는 결국 사방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대화가 통하지 않고,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죄의 결과인 셈입니다. 우리 삶의 대부분의 고통은 말이 통하지 않는 소통의 어려움 때문입니다. 똑같은 한국말인데도 세대 간에 소통 때문에 어려움을 갖습니다. 진보와 보수가 소통 때문에 어려움을 갖습니다. 이 소통의 문제가 바로 오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으로 해결되는 것입니다. 바벨탑에서 이뤄진 ‘불통’을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으로 ‘소통’케 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성령이 임하셨을 때 살아있는 교제(communion)가 회복되었습니다. 45, 46절 말씀입니다.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서로 나누고 마음을 같이하면서 떡을 떼며 모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할 때 우리 안에 진짜 사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진짜 사귐의 교제를 경험하게 됩니까? 많은 경우에 수련회 때, 부흥회 때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서로 부둥켜안고 울면서 위로하던 그때를 떠올립니다. 왜 그럴까요? 집 벗어나고, 교회를 벗어나고 마음을 비워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충만히 거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니까 우리 안에 진정한 사귐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C입니다. 성령이 임하니 방언이 터지면서 소통(communication)이 이루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소통이 이루어지니까 사람들 안에 진정한 교제 communion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47절입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바로 참다운 공동체 community가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성령의 3C 혁명”입니다. 우리 모두 말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는 ‘communication’ 소통을 원합니다. 또 우리 모두 ‘communion’ 진정한 교제를 원합니다. 그래서 소통하며 교제하는 하나의 공동체 ‘community’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초대교회에 가능했냐는 것이죠. 바로 성령이 임하셨을 때 나타난 것입니다. 더 정확한 말로, 성령으로 충만했을 때 이루어진 일입니다. 세상도 똑같이 이 세 가지를 가지고 싶어 합니다. 막힘없이 ‘소통’하고 싶어 하고, 마음 터놓고 ‘교제’하고 싶어 하고, 좋은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세상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들에게는 성령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열심과 사랑으로 교회에 모여도 성령께서 계시지 않으면 ‘3C’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이 세 가지를 이루려면, 성령의 소통, 성령의 교제, 성령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3C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중요한 것입니다. 3C는 현상들이고, 성령은 본질입니다. 성령이 충만히 거하시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도 이뤄집니다. 문제는 오늘날 교회가 성령님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

 

베드로는 오늘 36절에서 회개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면 ‘성령의 선물’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성령의 선물’, 예전 번역에는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고 했는데 같은 의미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선물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주시기 원하셨던 선물이 예수님인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주시기 원하시는 선물은 성령님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선물 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구약 시절에는 달랐습니다. 직분자에게만 성령이 임했고, 사명자에게만 성령이 임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십자가 이후에는 그를 믿는 모두에게 부어주시게 됐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성령을 선물로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를 믿을 때 우리는 성령세례를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우리는 이미 성령을 받았는데 초대교회처럼 이런 성령의 소통, 성령의 교제, 성령의 공동체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가? 자세히 보십시오. 그들에게 있었던 것은 2장 4절, ‘성령의 충만함’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보십시오. 고린도 교회 역시 초대교회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또 성령의 은사가 넘치는 교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리가 본받고 싶은 교회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령 충만한 교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이 말했듯이, 성령 충만의 증거는 성령의 은사를 소유하고 사용하는 것에 있느냐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가 익어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이란 성령이 내 안에 많아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령충만이란, 성령이 나를 더 많이 다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요’하는 말씀, 우리가 기도 응답에 관한 말씀으로 잘 알고 있지만, 그때 무엇을 구하라고 하셨나요?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11:13) 생뚱맞게 사랑하는 자녀에게 아버지가 성령을 주지 않겠냐 하십니다. 성령이야말로 아버지께서 자녀에게 가장 주고 싶은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구해야 할 제목이 바로 ‘성령 충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감람원에서 승천하실 때, 그곳에 있던 사람이 작게 잡아 500여 명이었으리라 추정합니다. 그렇다면 놀라운 사실이 발견됩니다. 주님께서 그때 그들에게 예루살렘에 머무르며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성령을 기다린 사람은 120 문도였습니다. 380은 어디 갔을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주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셨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성령의 충만을 명령으로 받들고 따르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되, ‘죄사함’에 머무는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마치 주님이 오지 않은 것처럼,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신 것처럼, 주님께서 그렇게도 주기 원하셨던 성령의 선물을 받지 않은 것처럼, ‘죄사함’에만 신앙생활을 멈추는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구원이 죄사함에서 멈추는 것은 반쪽짜리 구원입니다. 죄사함을 받았으면, 이제 성령으로 채워 거룩해져 가야 합니다. 성령의 사역은 대표적으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알게 하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를 닮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알게 하고, 주님을 닮게 하는 것, 이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이십니다. 우리 안을 성령님으로 채우면 우리는 주님을 닮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으로 채우지 않으니 쓰레기 같은 것들이 마구잡이로 홍수처럼 범람하고 침범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마음은 잘 청소했는데,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우지 않으니, 내 마음이, 우리 가정이, 우리 공동체가 사탄의 놀이터가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 ‘소통이 있어야 한다!’ ‘아름다운 교제가 있어야 하고, 공동체 의식이 있어야 한다!’ 모두 좋은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소위 ‘성령의 혁명’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지 않으면, 성령께서 충만하게 일하실 수 있도록 그 자리를 내어드리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열심은 한낱 구호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님을 그저 귀신 쫓는 어떤 신접한 영으로 취급하고, 방언을 말하게 하는 은사 정도로 폄하하는 한, 우리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죄를 날마다 회개하는 것 잘하는 것입니다. 이제 비웠으면 이제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워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한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colippastor@gmail.com

 

08.03.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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