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장로교회)
기드온과 그의 아들 아비멜렉의 삶이 사사기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몇가지 이유에서 좀 특별합니다. 기드온의 삶을 보면 첫째로, 지금까지는 다른 사사들이 전쟁을 치른 후엔 ‘땅이 평온했다’는 평가가 뒤따르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3:11,30; 5:31:8:28). 그러나 기드온 이후부터는 그런 말이 등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삼손 시대에 가서는 다른 사사들에게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이스라엘의 적들을 평정했다’는 말을 아예 찾아볼 수도 없습니다. 점점 악화되어 간 것입니다. 둘째로, 기드온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 했던 최초의 사사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을 때 그는 한 없는 겁쟁이였습니다. 포도주 틀에 몰래 숨어서 밀 타작하는 모습은 모양이 많이 빠집니다. 이런 그를 위해 하나님은 두차례나 기적을 행하셨고, 그가 적진에 몰래 들어가 적들이 하는 말을 듣게 하셔서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셨지요(삿7:9-15). 그런데 이후에 기드온은 기가 막힌 전쟁 구호를 백성들에게 외치게 합니다.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삿7:18). 무슨 말일까요? 전쟁의 영광을 자기도 공유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셋째로, 기드온은 왕의 자리를 탐하고 왕처럼 행세했던 최초의 사사였습니다. 그가 왕의 자리를 은근히 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백성들은 전쟁이 끝난 후 기드온에게 왕이 될 것을 권합니다. 그랬을 때 그는 겉으로는 아주 정답을 잘 말했습니다. 8장 23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23절). 얼마나 합당한 답변인가요.
하지만 바로 다음 절에서 그의 욕망이 드러납니다. 24절의 내용을 보면 기드온은 거의 즉각적으로 자신이 한 말에 어긋나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에게 금전을 요구해서 상당한 부를 축적합니다. 금18kg이 넘는 분량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에봇을 만들고 자기 성읍 오브라에 둡니다(삿8:27). 자기 동네를 또다른 성소로 만들어 하나님을 찾는 성지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고 싶은 욕망이 현실화 됩니다. 그러나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많은 아내들로부터 칠십 명의 아들을 두고(왕만이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세겜 여인에게 서자를 하나 두는데 그 아들의 이름을 ‘아비멜렉’이라 부릅니다. 잘 아시다시피 그 이름은 ‘나의 아버지는 왕이다(My Father is King)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기드온의 왕을 향한 욕망이 극대화된 것입니다.
이 불행한 욕망의 씨앗은 아버지 기드온이 죽자 그 아들 아비멜렉을 통해 심화되고 구체화됩니다. 사사기 9장 이후에 나타나는 비극적인 내용은 차마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는 아버지와는 다르게 노골적으로 왕이 되고자 민족을 분열시키고(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지금의 행태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정치 깡패들을 동원해서 자기 형들 70명을 일거에 학살시키려 합니다. 사사기에서 가장 비극적인 장면 중에 하나라고 생각되는 장면입니다. 이 엄청난 살육의 현장에서 다행스럽게도 단 한 명의 이복형제 요담이 살아남지요. 그리고 그는 세겜 사람들을 불러 한편의 우화를 메시지로 전달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이야기의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나무들이 자기들을 위한 왕을 찾아 나섭니다. 감람나무(8–9절), 무화과나무(10–11절), 포도나무(12–13절)에게 찾아가 왕이 되어줄 것을 청하지만 다들 각자의 이유로 정중히 사양합니다. 감람나무에서 나는 열매와 기름은 이스라엘 땅에 얼마나 유용한 자산인가요? 제의용으로 사용되고 식용 뿐만 아니라 치료용으로도 사용되는 올리브나무처럼 귀한 게 없습니다. 무화과 열매는 중동지방에서 가장 흔한 열매이지만 없어서는 안될 열매입니다. 설탕이 없는 시절 모든 당분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던 최고의 디저트 열매입니다. 포도나무는 포도주로 하나님께 전제로 부어져 드리니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사람들에게도 기쁨을 주는 귀한 나무입니다. 요담이 말하고 싶은 바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스스로 왕이 되려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어요. 그것은 각자 하나님께 받은 소명이 다 아름답고 귀했기 때문입니다. 감람나무는 기름으로 하나님께 봉사하며, 무화과나무는 열매 맺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포도나무는 포도열매로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을 소명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 맡은 작은 일들이 다 있으며 그 소명에 만족합니다. 자신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은 죄로 생각해야 합니다. 하지만 가시나무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존재목적을 모르기에 진정한 가치를 모르며 남들이 자기 밑에 들어와야 직성이 풀립니다. 기껏해야 높이가 50cm밖에 되지 않으니 그늘이 될 수도 없는 메마른 나무이지만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삿9:15)고 떠들어 댑니다. 존재 목적을 모르는 이들의 특징은 숨길 수 없는 열등감과 분노입니다. 분노의 불로 레바논의 백향목 같은 귀한 나무까지 다 태우겠다는 으름장을 높으며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왕이 될 자격도 없으면서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권력을 차지하려 합니다. 불안정한 자의식을 갖고 이래저래 자기 속에 있는 가시로 쉼없이 자신을 찔러대고(자학) 남들을 찔러댑니다(가학). 사실 우리 모두는 따지고 보면 다 가시나무 같은 존재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 형성된 수많은 상처와 쓴뿌리들을 해결하지 못해서 가시나무가 되어 살아갑니다.
하덕규 목사는 ‘가시나무’라는 아름다운 시를 담은 노래에서 이렇게 그 모습을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당신의 내면세계는 어떻습니까? 불행한 자아상을 가졌던 아비멜렉의 숨겨진 모습이 없다고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진 우리 모두 바람만 불면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던 그런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상처와 가시로 얼룩졌던 인생들을 향해 2천년 전, 질곡의 무게를 담은 가시 면류관을 쓰신 한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가시나무 같은 존재에서 포도나무 같은 존재로 변화될 수 있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는 말씀으로 우리를 초청하신 주님의 은혜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 안에서는 아비멜렉 같이 허황된 가시나무들도 온전하고 풍성한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빈곤한 자의식에 빠져 스스로를 자학하지 말고 각자에게 주신 주님의 소명에 감사하고 만족하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삶의 경계를 발견하며 예수 안에서 누리는 풍성함을 채워가시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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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6.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