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교협 회장, 필라사랑의교회)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도 잘 아는 성경 얘기를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 오늘 본문, ‘모세의 홍해의 기적 사건’일 것입니다. 이 재앙, 파리 재앙, 악질 재앙, 메뚜기 재앙, 그리고 장자가 죽는 재앙 이런 하나님의 엄청난 열 가지 재앙이 이집트를 뒤덮었고, 이집트는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스라엘은 400년 종살이를 마치고 출애굽하여 홍해 앞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곳에 진을 치게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었던 바로가 마음을 바꾸어 그들을 추격해 오게 된 것이죠.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쉼을 주고 안식을 주었던 홍해가 갑자기 그들을 막고 있는 커다란 장벽이 되어버립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런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바다 밑 육지로 걷게 하셨을까? 하나님께서 물 위를 걷게 하실 수도 있으시잖아요. 베드로가 물위를 걷는 장면이 나오니까 그리 어색한 얘기도 아닙니다. 또 어차피 홍해의 기적을 일으키신 목적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고, 또 애굽 군사들을 수장시키는 것이라면, 이스라엘 백성은 물위를 걸어서 통과하게 하시고 애굽 병사들은 그들을 따라 물위를 걷다가 갑자기 그 애굽 병사들을 삼켜 버리면 되잖아요. 왜일까요? 왜 물 위를 걷게 하지 않으시고 물밑을 걷게 하셨을까요?
애굽 vs. 하나님의 싸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본문에 등장하는 ‘싸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가장 먼저 이스라엘 백성 vs 애굽 군사(바로)의 싸움이 보입니다. 그것은 소위 ‘보이는 싸움’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보이는 싸움에 집중하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이렇게 ‘보이는 싸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싸움’이 있습니다. 오늘 이스라엘과 애굽 군사들과의 싸움 말고 오늘 이 홍해의 사건 속에 보이지 않는 싸움은 무엇일까요? ‘애굽 대 이스라엘’이 아니라, ‘애굽 대 여호와 하나님’의 싸움입니다. 13절, 14절에 이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 우리가 언제 이 말을 합니까? 능력 있는 사람이 능력 없는 사람에게, 나이 많은 사람이 나이 어린 사람에게 보호하며 하는 말입니다. 내가 대신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 이 말은 결국 이 싸움이 하나님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싸움이 ‘하나님 대 애굽의 싸움’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릅니다. 알기는 아는데, 알았다 몰랐다 합니다. 그들에게 있는 ‘두려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왜 두려워할까요? 그 싸움이 자기들이 하는 싸움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요? 두려움의 실체가 무엇일까요? 10절에 보니까,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2절도 “우리를 내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워한 것은 바로 ‘애굽 사람’입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죠. 노예가 그 주인을 두려워하는 것이. 더 두려웠던 것은 ‘애굽 군사’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채찍을 들고 있는 모습, 칼을 들고 있는 모습에 아마 트라우마가 있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 군사들은 그들을 죽이겠다고 말을 타고 달려들고 있는, 독기 품은 군대였습니다. 당연히 두려웠을 것입니다. 왜요? 그 싸움이 ‘애굽과 자기들(이스라엘)의 싸움’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두려워하는 이 이스라엘 백성과 반대로, 두려워야 하는데 두려움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나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것은 ‘바로’입니다. 지금 열 가지 재앙을 맞아 그의 나라는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나라뿐 아니라, 그의 가정도 자기 큰아들까지 죽으면서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그만하면 하나님께 항복할 만도 합니다. 아니, 사실은 항복했었죠. 그런데 다시 덤벼들고 있습니다. 분명히 열 가지 재앙을 당하면서 그도 알았습니다. 이 싸움이 이스라엘과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말이죠. 그런데 그 사실을 금세 까먹고 또다시 덤벼들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의 입장에서는 이렇습니다. 실은 지금까지 그가 겪은 싸움은 보이지 않는 것들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적이 있는데, 적이 안 보입니다. 그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것들과의 싸움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늘에서 우박이 떨어지고, 개구리들이 올라오고, 흑암이 덮이고.... 그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릅니다. 적이 눈에 보입니다. 도망가는 이스라엘 백성이 보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싸울지도 환히 보입니다. 그에게는 칼이 있고, 병거가 있고, 막강한 군사력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엔 기필코 이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이것이 그가 내린 또 한 번의 오판입니다. 그는 그 싸움이 하나님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또 잊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싸우시는데 자기들이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바로는 두려움을 잊었습니다. 보이는 이스라엘과 싸운다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싸움: 나 vs 하나님
하나님은 백성들이 두려워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두려워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두려워 말고 가만히 있으라.” 그런데 ‘두려워 말라’는 말씀은 이해되는데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사실 어려운 일입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 가장 쉬운 일 같지만, 가만히 있는 것처럼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두려울 때는 소리라도 지르고 누군가에게 호소해야 덜 두렵습니다. 왜 애굽과의 싸움을 선포하시면서 그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하실까요? 사실 이것이 본문에 나타난 진짜 “보이지 않는 싸움”입니다. 지금 홍해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은 ‘애굽 대 이스라엘’의 싸움도 아니고, 심지어 ‘애굽 대 하나님의 싸움’도 아닙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이스라엘 대 하나님과의 싸움’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싸우고 계시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께서 바로를 치는 싸움 같습니다. 하지만 그건 싸움이라고도 할 수 없는,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싸움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진짜 싸우고 계신 싸움은 ‘바로’가 아니라, 이스라엘과의 싸움, 즉 ‘나’와의 싸움인 것입니다. 이 싸움은 홍해의 싸움에서 끝나는 싸움도 아니고, 광야생활 내내 이어지는 싸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바꾸실 수 있지만, 우리의 마음만은 억지로 바꾸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로의 마음보다 더 강퍅한 것이 바로 우리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가만히 있으라” 하신 것입니다. 순종을 가르치시며 그들과 싸우고 계신 것입니다. 왜 물위를 걷게 하지 않으시고 물 아래 땅을 밟아 걷게 하셨을까요? 물위를 걸었다면 이 교만한 백성이 그것을 자기자랑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물위를 걸었노라’고 자랑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바다밑을 걸었을 뿐입니다. 바다 밑을 마른 땅 걷듯이 통과하며 그들 입에서 저절로 터져 나왔던 말은, ‘아, 이 일은 하나님이 하셨어.’ 이 말밖에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싸움은 나와 XX와의 싸움도 아니고, 나와 어떤 상황과의 싸움도 아닙니다. 오직 나와 하나님과의 싸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고치고 계시고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요나서의 주제는 니느웨를 고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요나를 고치시는 하나님입니다.(요~나) 출애굽기의 주제는 ‘(애굽과) 바로와 싸우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과 싸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등 4복음서의 주제는 주님이 바리새인과 종교지도자들과 싸우시는 얘기가 아니라, 결국 주님이 믿음 없는 제자들(곧 우리들)과 싸우시는 얘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고치기 전에 교회를 고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나와 싸우고 계십니다. 나를 고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32장, 야곱이 하나님과 밤새도록 씨름하는 장면을 기억해 보십시오. 왜 야곱은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하나님과 싸워야 했을까요? 깨지지 않으려는 자와 깨뜨리려 하는 자가 맞붙었기 때문입니다. 줄곧 ‘속이는 자’의 삶을 살았던 ‘고집스런’ 야곱과 그 고집을 마침내 부숴 버리고야 말겠다고 ‘고집하신’ 하나님이 싸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야곱의 환도뼈가 부러졌다고 했습니다. 야곱이 깨지지 않으려고 저항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새 이름을 주십니다. 그 이름은 ‘이스라엘’, ‘하나님과 싸워 이겼다’는 뜻입니다. 이상하죠? 허벅지가 부러진 쪽은 분명히 야곱인데 왜 야곱이 하나님을 이겼다 말씀하실까요? 진짜 이김은 내가 죽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To die is gain! 진짜 이김은 내가 부서지는 것입니다. 그걸 기어이 끝끝내 포기하지 않고 야곱에게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처음에 야곱은 그 싸움이 다시 만나야 할 자기 형과의 싸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니야, 이 싸움은 나와 너의 싸움이야’ 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안에 있는 ‘사람(형 에서)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얍복강’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밤새 싸워야 할 얍복강이 있습니다. ‘그것을 내려놓으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요구와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그것을 내려놓지 않겠다’고 싸우는 ‘얍복강’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야곱이 얍복강에서 붙잡고 있었던, 오늘 이스라엘이 붙잡고 있었던, 그리고 오늘 내가 ‘꽉’ 붙잡고 있는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두려움입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형 에서가 두려운 것이고요, 애굽 사람 (바로)이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이 두려움을 이긴다!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그 두려움을 치유하십니다. 31절 말씀입니다. 홍해 사건의 결론입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하나님을 경외하게(두려워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 대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짜 두려운 것이 오면 작은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이것이 신앙의 역설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 세상은 기껏해야 우리의 몸을 죽이겠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몸과 영혼을 멸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십니까? 그 어떤 것도 하나님보다 두려운 분은 없습니다. 진정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오늘 홍해의 기적 사건을 통해 보여주시는 싸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애굽 대 이스라엘’, 혹은 ‘애굽 대 하나님과의 싸움’입니다. 하지만 그건 보이는 싸움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을 뜨고 보면, 홍해에서 벌어진 또 하나의 싸움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싸움’, ‘하나님과 나와의 싸움’입니다. 그 싸움이 정말로 이 홍해 사건을 통해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보이지 않는 싸움”입니다. 그 싸움은 무엇을 진짜로 두려워해야 하는지를 알게 하는 싸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산신령처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을 사랑함으로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그분을 ‘경외’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그분을 사랑하면, 내 안의 모든 두려움은 떠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보이지 않는 싸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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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0.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