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하는교회 담임)
하나님에 의해 변화된 사람을 성도, 본질이 바뀐 새사람입니다. 궁금한 것은 그렇다면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검증할 수 있을까요?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by the renewing of your mind”(롬 12:2).
여기서 마음은 ‘생각’입니다. 즉 변화된 사람은 생각하는 관점이 새로워집니다. 생각의 변화입니다. 변화되기 전 가치 기준으로 삼았던 관점이 하나님의 관점으로 고정된다는 뜻입니다. 판단, 행동, 감정이 하나님에게 정 조준되는 변화입니다. 생각은 시 공간을 초월할 뿐 아니라 과거와 미래까지 넘나드는 폭 넓은 영역에 존재합니다.
예를 들면 몸은 여기 미국에 있는데 생각은 한국에 가 있어 공간을 지배하기도 합니다. 왕이 되기도 하며 집 없는 노숙자가 되기도 합니다. 사람을 죽이고 살리기도 합니다. 과거로 돌아가 어린 시절로 시간을 거꾸로 돌리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니 생각으로는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생각이 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아침 눈을 뜨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온통 생각의 숲을 헤집고 다니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일 골프를 치느냐? 예배를 드리느냐? 갈등도 생각으로 결정됩니다. 생각에 갈등이 일어난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변화를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의 판단 기준에 신앙적 갈등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의 생각에 관여하고 있다는 단편적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목적은 변화된 성도의 생각으로 전달됩니다. 왜냐하면 변화된 성도는 생각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늘 관찰하십시오. 생각은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입니다. 물론 그것은 성경 말씀의 기초 위에서 적용되는 범위로 한정됩니다.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요 18:17).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 26:75). “생각이 나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에 대해 이미 말씀하신 생각에서 실패했습니다. 아쉬움이 큽니다. 베드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예수님을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부정한다는 예고된 말씀을 생각했더라면 뒤집어 “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답하는 것이 당연한 논리입니다. 부정적으로 예측된 예수님의 말씀을 베드로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베드로는 예라고 응답했어야 합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베드로는 예고된 예수 그리스도 말씀을 끄집어내는 생각에서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생각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갈등의 구조에서 늘 하나님 편으로 생각을 기울여 보십시오. 여러분 생각에서 결정한 행위가 마음 편치 않다면 그것은 거의 하나님 마음과 거리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베드로의 생각이 엇갈릴 때 베드로는 그 문제가 해결되기까지 마음 편치 않았습니다.
늘 상 월마트 앞에서 보던 노숙자 흑인 아저씨가 프로즌 요구르트 옆 판다 익스프레스 식당 앞에서 오늘은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와이프와 종화가 마침 그쪽으로 가다가 흑인 아저씨를 만납니다. 순간, 흑인 아저씨에 도움을 주고 싶은 생각이 스칩니다. 주머니에서 2불을 꺼내 아저씨에게 건넵니다. “Thank you. God bless you.” 흑인 아저씨는 돈을 받자마자 옆 판다 익스프레스 식당으로 가장 빠른 걸음으로 들어갑니다. 흑인 아저씨는 그날 저녁 식사비용으로 2불이 모자랐던 것이 분명합니다. 흑인 아저씨가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던 그 손길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생각, 바람처럼 훅 지나갈 수 있습니다. 생각, 그 바람소리를 듣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생각, 아주 잠시 느린 걸음으로 한 발자국만 더 걸어 보십시오. 생각, 모서리에서 미끄러지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십시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8). 이것이 바울의 생각입니다. 그 지점까지 오르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살아가는 생각의 처음과 끝이 예수 그리스도 마음으로 온통 빈틈없어야 할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인은 하나님으로 인해 본질이 바뀐 새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받은 성도는 생각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읽습니다. 당연히 이 시대를 읽는 분별력이 생깁니다. 다시 한 번 로마서 12장 2절을 정독하십시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을 영어성경(NLT)은 “복사(copy)하지 말라”고 했으며 또 다른 영어성경(KJV, NIV, NASB)은 conform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세상의 규칙, 관습, 법을 따르지 말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에 세상의 가치, 정신까지 포함된 포괄적인 세상을 말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머리에 뿔 달린 모습으로 우리 시야에 들어온다면 분별하는데 어려움이 없지만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온갖 포장을 해서 나타나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인간애, 평등, 평화, 차별금지법, 인간존중과 같은 무기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그런 주장이 황당하거나 틀리지 않을 뿐 더러 하나 같이 설득력 있는 법규 조항들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세상 가치기준으로 성경은 골동품과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필자의 저서 <엽서>에 글을 썼던 엘리스 엔 베일리의 10가지 계획(Alice Ann Baily’s 10 point plan)을 참고하시면 세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엽서, 백승철, 영문출판사, PP126-135).
요즘 세상의 관점은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는 중요한 논쟁거리가 아닙니다. “이것이 성경의 기록”이라는 진리 문제도 세상의 가치 판단에 의해 결정됩니다. 세상의 생각과 일치되는 지점에서만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진리 문제는 개인의 판단과 선택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를테면 구원받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비롯된다는 논제는, “그럴 수 없다.” 모든 종교에도 나름 구원이 있으며 서로 다른 종교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세상의 판단 기준입니다. 동성애가 “죄가 되느냐, 아니냐?”는 논쟁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자유로울 평등의 가치 기준이 성경의 말씀 위를 선점한지 오래입니다. 성경과 세상이 충돌을 일으킬 때 세상은 언제나 인간의 존재론적 가치기준으로 해결점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단언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적당히 타협점을 찾아보라는 권면이 결코 아닙니다. 세상이 아무리 급변해도 성경이 아니라 하면 아닙니다. 세상 흐름에 맞게 왜 아니냐를 따진 다면, 그래도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지상의 모든 교회와 신앙인이 지켜야 할 마지막 보루입니다.
변화된 성도에게 나타나는 또 하나의 뚜렷한 현상은 하나님의 뜻을 구별하는 지혜가 생깁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여기서 “분별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입증, 인정, 증명하려는 뜻입니다. 적어도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증명하는 혜택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입증하지 못합니다. 증명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같습니다. 신앙인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존재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선합니다. 즉 처음과 끝이 언제나 좋은 결과를 만듭니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하나님 자신이 기뻐하는 작품입니다. 그 하나님의 기쁨을 신앙인이 함께 공유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부족함이 없습니다. 완벽, 완전합니다. 빈틈이 없습니다. 차고 넘치는 온전함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에 의해 변화된 사람입니다. 생각의 변화를 늘 조심히 살피십시오. 신앙인은 세상의 복사판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복제되지 않도록 순간마다 확인하십시오.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입증되는 축복을 경험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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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3.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