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백민교회 원로목사)
예전에는 무슨 일이 변하는데 50년–100년씩이 걸리던 것이, 지금은 1-2개월이면 바뀌어버린다. 무슨 영역이든 변천 속도가 빨라졌다. 이런 세태 속에서 하나님 백성들의 준비가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세상이 변하는 대로 따라갈 수만은 없다. 우리는 영원 유일무이한 성경을 기준으로 해서, 그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온 마음을 집중해야 한다. 옛날, 세상에 하나님을 알게 하는 역할을 맡은 자들은 선지자들이었다. 그 선지자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다.
히브리어 나비(איבִנָ)는 mouthpiece of(for) God 으로 하나님을 위한 입, 하나님의 입, 하나님의 대변자라는 뜻이다. 사람은 자신의 입으로 자신을 나타낸다. 그런데, 선지자는 자신의 입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낸다는 말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의 영혼 밑바닥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은 이 일을 가능케 하셨다(전 3:11). 피조물의 자유를 보장하신 하나님 앞에 각 사람이 보이는 반응에는 차이가 크다. 하나님을 아예 도외시하고 살아가기도 하고, 지옥에 떨어지기는 싫고 무서워 적당한 선까지만 따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사람 중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을 따르려는 이들도 있다. 성경은 그런 사람은, 곧 선지자들을 소중히 소개한다. 사람들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 하나님 앞에 사는 자들이다.
1.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알고 있지 선지자라고는 알고 있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선지자라고 하신다(창 20:7). 성경에서 사람을 선지자라고 칭하기는 처음이다. 하나님을 알지 아니하는 이방인들 틈에 거하면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은 항상 긴장 속에 살아야 했다. 가나안 땅에 임한 극심한 기근으로 애굽에 내려갔다가, 바로 왕으로 인해 목숨을 잃을까 봐 아내를 누이라 했다(창 20:10-20). 그런데 또 한 번의 기근으로 블레셋 통치권 아래 있는 그랄에 우거하려 내려갔다가 같은 생존책을 동원했다(창 20:1-7). 두 번 모두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셔서 아브라함에게 비극적인 일이 생기지 않게 보호하셨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낯선 이방인들 틈에 거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애틋하게 보시는 하나님의 보살핌이다. 연약한 중에도 그의 삶은 자신보다 하나님을 기준 삼아 영위되었다. 자신의 이해 보다 하나님의 말씀, 자신의 형편보다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길을 따랐다. 그런 삶이 조카 롯과의 관계, 소돔 왕의 뇌물 거절, 멜기세덱 제사장에의 십일조 봉헌으로 나타났다. 무엇보다 자식 하나 없이 늙을 만큼 늙어버린 자기 내외인 줄 알면서도, “네 자손을 하늘의 뭇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알 같이 많게 하리라”(창 15:5-6)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피조물 인생이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는 마지막이요 유일한 길이다. 아브라함은 또한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 받기도 했다. (대하 20:7, 사 41:8, 약 2:23)
2. 모세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와 광야행군을 하는 동안, 선지자 제사장 왕의 직무를 담당했다. 430년 동안의 애굽 노예살이를 청산하고, 광야에서부터 하나님 백성으로서 행군할 때 필요한 직무였다.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셨던 직무다. 모세는 하나님을 대면하여 볼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24-31을 통해 모세의 삶을 남겼다. 애굽의 왕(바로)이 될 수 있는 공주의 아들 신분을 따라 살기를 거부하고,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 백성과 고난받기를 즐겨 택했다고 풀이했다. 모세는 눈에 보이는 애굽왕의 위협과 핍박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권능과 인도하심과 그 말씀을 더 믿고 행군했다. 행군 도중 반복되는 백성들의 불신과 불평, 저항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그 처분을 기다렸다. 백성을 위해 감당하는 모든 역경과 희생을 기쁨으로 감당했다. 백성이 멸함 받는 것 보다 자신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제해 달라 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마음에 뿌리를 두고 살아갔다. 자신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마음 아팠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 순종했다. 자기 대신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워 힘을 다해 하나님의 구속역사가 이루어지게 한다. 모세는 자신보다, 세상보다 하나님을 앞에 모셨다. 이것이 선지자요, 선지자의 삶이다.
3. 사무엘
사무엘 역시 모세 시대와 비슷한 면이 있어 역시 3대 직분 선지자 제사장 왕의 직무를 수행한 사람이다. 수백 년의 사사 시대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함께하심이나 통치를 경험하게 할 수 없었다. 엘리가 제사장직에 있었지만, 그는 늙고 하나님보다 자식들에게 마음을 더 기울이며 살았던 인물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 시대를 '하나님 말씀이 희귀했다'고 진단했다. 이런 시대에 사무엘은 엘가나와 한나를 부모로 태어났다. 잉태하지 못함을 하나님께 눈물로 구하던 엄마의 기도 열매였다. 아들을 주시면 그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겠다는 서원이었다. 사무엘은 엄마의 서원과 그에 따르는 지극한 보살핌으로 성장했다. 그러기에 그의 의식구조는 하나님 중심이었다. 그는 백성들이 왕을 새워달라 요청했을 때, 섭섭하고 동의할 수 없었다. 백성들은 하나님보다 세상, 하나님의 지도하심보다 사람들의 여론과 풍조에 더 휩쓸리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백성들이 원하는 대로 왕을 세워주라 하셨다. 너무도 의외였지만 순종했다. 베냐민 지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세우는데, 그는 이스라엘 중에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다른 사람보다 어깨 위는 더한 사람이었다. 일단 사람들의 호감을 살만한 자였다. 그러나 그는 왕으로서 실패한 자였다. 이유는 하나님보다 사람 편에 섰고, 하나님보다 자신의 인기와 영광에 더 치우쳐 행했기 때문이다. 사무엘은 비록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기는 했지만, 사울을 왕으로 기름 부어놓고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살아생전에 저를 보고 싶지 않았다. 다시 하나님의 지시대로 다윗을 다음 왕으로 기름 붓지만, 다윗이 왕위에 올라 선정을 베푸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역사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아 살지만, 세상의 박수갈채를 받아본 적이 극히 적다. 거칠고 외로운 인생이었다. 그러나, 메시아의 조상이요 그림자와도 같은 다윗을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왕이 되도록 기름을 부었다. 성경은 다윗 역시 선지자라 밝힌다(행 2:30). 아브라함도 모세도 사무엘도 모두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속역사의 대를 잇는 이음새로 살았다. 사람은 누구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감당하다가 다음 대에 물려주고 자신은 하나님과 함께한다. 자기가 시작한 일은 없다.
4. 이사야
이사야는 흔히 대선지자, 그가 쓴 이사야 서도 대선지서로 분류한다. 왕족 배경을 가진 그는 히스기야 왕과도 가까이 지냈다. 그는 구약의 복음서라 불리는 66장에 달하는 선지서를 썼는데, 메시아로서 이 땅에 오셔서 사역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크게, 세밀하게 예언했다. 그에 반하여 선지자로서의 그는 무척 고달픈 인생을 살아야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또 외치지만 듣는 사람들이 희귀해 보였다. 그래서 하나님께, 언제까지 외쳐야 하느냐고 묻는다(사 6:11). 그에 대해 하나님은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있을 것임 (사 6:13)'을 분명히 하신다.
5. 엘리야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명사 격인 인물이다. 북이스라엘을 바알 숭배의 수렁에 몰아넣은 아합왕과 맞대결하고, 바알, 아세라 숭배 제사장 850명과 갈멜산 대결에서 통쾌한 승리를 일구어낸 대선지자다. 3년간의 가뭄을 불러오기도 했다. 그런 엘리야 역시 지칠 때가 있다. 뛰어도 뛰어도 열매가 없어 보이는 사역 앞에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지쳐 '하나님 이제 족하오니 내 생명을 거두어 가시라'하고는 로뎀나무 아래에 누워 그저 잤다. 자고 눈을 떠보니 하나님께서 숯불에 구운 떡과 물을 먹게 하고 힘을 내도록 권고하신다. 엘리야는 맛있게 먹고 다시 누워 잠을 잔다.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힘을 주신다. 일어난 엘리야는 40주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른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언어로 기록하여 소통을 시작하신 역사의 출발점이다. 하나님은 이런 엘리야에게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7,000명이 있음을 알게 하셨다.
이제 말씀을 맺어야겠다. 하나님은 창조적 그 뜻을 버리거나 변경시키는 분이 아니다. 창조하신 것을 심히 기뻐하신 것처럼(창 1:31), 지금도 우리를 심히 기뻐하시는 그 마음을 이기지 못하신다(습 3:17). 우리도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을 굳세게, 영원토록 붙들고 사는 것이다. 초등학교 다닐 때 10리(4km) 거리를 걸었는데, 폭우가 쏟아지면 흙탕물 천지가 되어 바로 건널 수가 없었다. 돌멩이 피하고 물살에 밀리다 보면 우리 마을이 어디에 있는지 한참을 찾아야 할 정도로 밀려갔다. 나중에 보니 냇물 건너편에 정자나무가 있음을 발견했다. 그때부터 눈을 그 정자나무에 맞추고 건너니 밀려 내려감을 면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는 확고한 기준, 목표가 있어야 한다. 부모의 도리를 따라 살아야 한다(신 6:5-9,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 세 살 버릇 여든 간다 한다. 사회문제, 청소년 문제의 근원이 어렸을 적 가정에 있다는 사실은 이미 드러났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을 따라 지으신 피조물로서, 어렸을 적부터 그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은 우선 내가 복되고, 후손들을 복되게 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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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4.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