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성시화운동 공동대표 회장)
우리는 11월을 감사의 달로 지키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 때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 년에 세 번 절기를 지키도록 명령을 하셨습니다. 바로 무교절(유월절), 맥추절(칠칠절), 수장절(초막절)입니다.(출 23:14-17)
그런데 현대 개신교에서는 대부분 성탄절과 부활절 그리고 추수 감사절을 중요 절기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추수 감사절은 구약의 수장절과 연관이 됩니다. 구약 시대 때 농사를 지어 얻은 곡식을 저장해 두고 한 주간 동안 초막에서 생활하며 하나님께 절기를 지켜왔던 배경을 알고 있던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이주해 왔습니다. 그들은 숱한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 힘들게 힘들게 농사를 지은 후 그 추수를 감사하면서 자기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주었던 인디언들을 초청해서 잔치를 베풀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런 신앙적인 배경에서 추수 감사절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 당시 청교도 이주자들의 수장이었던 총독 브래드 포드가 1623년에 추수 감사절을 지킬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했습니다. 그때부터 미국에서는 국가적인 절기로 지켜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농경사회와 달라진 지금은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를 지켜 주시고 축복해 주신 사실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사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1. 감사는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 때 선지자들이나 성경 저자들을 통해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감사하도록 명령을 하셨습니다. 지면 관계로 일일이 다 열거 할 수는 없지만 시편을 묵상해 보면 그런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실례로 시편 136편 말씀을 보면 26절로 기록된 그 말씀 가운데 “여호와께 감사 하라”는 말씀이 스물 여섯 번 나옵니다. 매 절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는 명령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구약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가 기록한 13권의 서신서를 통해 그런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인 살전 5:18 에도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명령하고 있죠?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께서는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섭섭한 생각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전도 여행하실 때 사마리아와 갈릴리 가까운 마을로 들어가셨는데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것을 알게 된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당시 나병은 저주받은 병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집안에서 가족들과 같이 살 수가 없었습니다. 동시에 공동체 안에서 거주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아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나 계곡 같은 곳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생각하시고 그 자리에서 그들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병을 고침 받은 이후 예수님께 찾아와서 감사를 표현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온 자가 없느냐”(눅 17:17-18)고 반문하셨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섭섭함을 들어내신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이 들어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세계적인 문호로 알려진 셰익스피어의 작품 가운데 “리어왕”이란 작품이 있습니다. 그 작품 가운데 리어왕이 나이가 들고 기력이 쇠해진 노인이 되었을 때 자기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면서 키웠던 딸들로부터 배신을 당합니다. 참을 수 없는 상처를 당한 리어왕은 혼자 이런 독백을 중얼거립니다. “감사 할 줄 모르는 자식을 둔 것은 마치 독사의 이빨보다 더 날카로운 것을 가지는 것 같구나” 작가가 던지고 있는 메시지는 감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주는 경종이 아니겠습니까? 감사는 우리가 선택할 조건이 아니고 반드시 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2. 받아 드림의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나가다 보면 우리의 의지나 생각과 전혀 다른 일들에 부딪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원치 않았던 사고를 당할 수도 있고 잘 알고 믿고 있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해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 생활하면서도 그런 일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물질적인 피해를 당할 때도 있고 원치 않은 질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일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3년 동안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그와 같은 아픔과 상처를 직접 받아 왔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그런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런 사실에도 감사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께서 본문을 통해 주시는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범사란 말은 모든 조건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일에는 누구나 감사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어려운 일이나 마음에 부담이 되는 일에도 그것을 받아 드리면서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참된 감사의 모습입니다. 받아 드린다는 것은 마음 문을 열고 수용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입니다”(롬 8:28)
바울 사도는 이 말씀을 자기의 삶의 모든 현장에서 직접 실현했습니다.(고후 11:23-28) 이런 자세로 받아들임의 믿음으로 감사하며 살아나가면 우리의 믿음이 성숙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3. 작은 일에 감사하면 또 다른 감사 제목을 주십니다.
유명한 설교자 스펄전 목사님은 그의 책에서 이렇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별 빛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달빛을 주실 것이다. 달빛을 주신 것을 감사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햇빛을 주실 것이다. 햇빛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햇빛조차 필요 없는 신비로운 광채를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비춰 주실 것이다.” 작은 일에 감사하면 하나님께서는 더 큰 감사할 제목을 주신다는 평범한 말씀이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소한 일에도 감사를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또 다른 감사 거리를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숨을 쉴 수 있는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 있는 것도 감사한 일이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아주 사소한 일입니다. 움직이며 거동할 수 있는 것도 감사한 일이요 내 손발로 운전대를 잡고 움직일 수 있는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내가 일용할 양식이 있는 것도 감사한 일이요 몸을 쉴 수 있는 거처가 있는 것도 가족들이 곁에 있는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마음을 놓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도 감사한 일이요 아주 사소한 일들 같아 보이지만 당연히 감사하면서 사셔야 합니다. 원망과 불평은 우리의 영혼을 갉아먹는 일입니다. 사소한 것 보잘것없는 것에도 감사하면 하나님께서는 분명 더 큰 감사 제목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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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