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훈련소에서 군사 기초훈련을 받을 때 기다려졌던 날은 주일이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러 갈 수 있었고 또한 고된 훈련도 잠시 쉴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쉽게 교회 갈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에 다녀본 적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내무반에 남아있다가 다른 작업에 동원되기 싫어서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며 주일에 교회에 가겠다고 긴 줄을 서는 훈련병들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많으면 좋은 일이겠지만, 정말 교회 가고 싶었던 제게는 끔찍한 매 주일이었습니다. 훈련소의 주일 아침은 ‘가짜 신자’들이 대거 양산되는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꼭 군대 안에서만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입으로는 신자라 하지만 사실상 참된 신앙은 소유하지도 드러나지도 않는 ‘가짜 교인’들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그런 경우에 대해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 주는 내용입니다.
이 본문 바로 앞에 저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 즉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우리 신앙의 핵심적인 고백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 말이 한 번 입에서 나왔다고 해서 다 진실한 신자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을 참 고백으로 만들어 주고 확인시켜 줄 수 있는 구체적인 기준이 무엇인지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이어지는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기준은 바로 '두 번째 십자가'라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참된 신앙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진실한 고백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신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라는 확실한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의 구세주로 오셨을 때 그 최고의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똑바로 알고 믿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에서 “이때로부터”라고 어떤 기준 시간을 말씀합니다. 그 기준점은 베드로가 유명한 신앙고백을 한 바로 그 시점부터라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하자마자 예수님께서는 다음 단계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그에게 '그리스도' 즉 구세주의 사역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주님의 비장한 말씀에 대해 베드로는 즉각 반응하기를 "예수님, 안 됩니다. 그런 일이 주님께 생겨서는 결코 안 됩니다."라고 단호히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이것은 언뜻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하여 나온 말 같지만, 사실은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일반적인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기대감이고 이런 기대감에 같이 물들어 있던 베드로의 생각이었습니다. 즉 메시아만 오시면 이스라엘 민족은 만사형통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메시아라면 그 정도는 충분히 하고도 남을 능력이 있어야 할 것이고, 또 메시아로서 당연히 해 주어야 할 가장 급한 일이고 가장 필연적인 의무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처럼 순전히 세속적인 메시아만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에게, 그 메시아가 로마군의 형틀인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것은 베드로에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다가 이제 눈앞에서 만나고 그리스도로 고백하여 칭찬까지 해주신 그 메시야가 비참한 모습으로 죽게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견디기조차 힘든 일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바로 그와 똑같이 오해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어 주면 적어도 이 소원은 이루어 주시겠지. 당연히 이 정도는 해 주어야 하겠지."라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메시아 상을 마음대로 정하면서 성도가 되겠다고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무엇보다도 당신의 죄사함을 얻게 됩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겨우 죄 사함인지 뭔지 하는 것뿐이야? 훨씬 더 급한 내 인생 문제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것들부터 당장 좀 풀리도록 해 줘야지."라고 생각하는 교인들이 수두룩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자다.”라고 책망하십니다. 큰 칭찬을 받았던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따끔한 책망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마음과 입을 도구로 사용하고 있던 사단을 두고 하신 책망이기도 했습니다.
그처럼 귀한 첫 신앙 고백자였던 베드로조차 금새 사단의 대변인 노릇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입과 마음을 잘 지키지 못하면 사단의 생각을 전하는 도구로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두렵고 조심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를 사해 주시는 것보다는 내 육신을 따뜻하고 배부르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예수님께서 택하신 자기 백성을 위해 저 천국을 예비해 주시는 것보다는 당장 이 인간 사회에서 완전한 정의와 평화를 이루어 주시는 것이 백번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 것이요 곧 '사단의 사고방식'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죄라고 생각하십니다. 다른 것들 다 제쳐 놓고 먼저 죄로부터 자유로워야 성도로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되고 천국을 소유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 문제 해결을 위하여 성취하신 일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이제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참된 신앙은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알고 그 대속의 은혜를 진실하게 고백함으로써 성립될 수 있음을 깨닫고, 이처럼 '믿는 십자가'를 자신의 심령에 확고하게 간직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믿는 십자가는 지는 십자가에 대한 의무가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2번째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십자가입니다. 베드로에게 첫 번째 십자가의 의미를 똑바로 깨닫게 해 주신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십자가 하나를 주셨습니다. 신자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입니다. 왜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려 하면 이처럼 엄청난 고난까지 감수해야만 합니까? 왜냐하면, 그 길은 고난의 경주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 길은 '생명을 걸고' 따라가는 길인 것입니다.
장차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은 좀 잃게 될 것을 각오해야 함은 이 세상에서도 상식입니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은 노는 시간을 잃어버리고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렇게 잃어버린 시간이나 돈을 두고 손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 결과는 분명히 '훨씬 더 좋은 것'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바로 이 원리를 적용시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자기 십자가' 정도의 투자는 당연히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26절에서 하시는 말씀,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라는 말씀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절대명령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길이란 바로 우리의 생명,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귀한 영생을 바라보고 따라가는 인생 최대 최고의 경주입니다. 자기 십자가가 어떤 것이든지, 그 주님 따라가는 길에 필연적으로 우리 어깨에 지게 되어 있는 성도의 고난입니다. 이 고난이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피하려 하다가 영생을 놓치는 일생일대의 과오는 결코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자기 십자가'에 헌신함으로써 영생을 얻게 될 그 날의 영광을 27절에서 다시 상기시켜 주고 계십니다. 그날에는 우리가 모두 "각기 행한 일"대로 상을 받게 되는 날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날은 예수님을 아예 믿지 않았던 사람들뿐 아니라 입으로 신앙고백은 했지만, 그저 편하게 살려고만 하고 자기 생을 바쳐 섬기는 일이 전혀 없었던 신자들까지 "제 목숨을 잃고" 영벌에 빠지는 날이 될 것입니다. 반면에 아예 자기중심의 생을 완전히 부인하고 주님의 뒤를 따라 함께 고난받기를 각오하고 따라갔던 성도들은 주님과 영생하는 진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이 영광을 이 세상에서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간단한 계산조차도 현실에서는 해내지 못하는 교인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지게 되는 '우리의 십자가'가 무겁고 힘들기 때문입니다. 잘 살펴보면 이전에는 나만을 위해 쓰던 시간과 힘과 물질 중에서 일부분은 주님을 위해 쓰는 정도가 아닙니까?
사도 바울과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지고 갔던 순교의 고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두고 우리는 끙끙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천국에서 쓸 '영광의 면류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참된 신앙은 이처럼 '두 번째 십자가' 즉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에게 닥치게 되는 고난 역시 필연적임을 깨닫고,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희생과 충성으로써 끝까지 지고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최고의 신앙고백이 멋지고 참된 것이 되기 위해서 꼭 동반되어야 할 '두 번째 자기 십자가'를 오늘 우리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뒤를 따르는 제자에게도 또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알고 바로 그 고난에 기꺼이 동참할 수 있어야 우리의 신앙고백은 진실한 것으로 증명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이 '두 십자가'가 없는 신앙생활이란 헛된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물론 '진짜 신자'와 '가짜 교인'들이 섞여 있습니다. 다들 '입으로는 시인'했으니 겉으로는 구별하기가 쉽지 않지만, 주님께서는 그 입만 보고 판단하지 않으시고 자기 십자가를 살펴보고 계십니다. 진심으로 믿고 고백하는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를 늘 간직하고 자신의 삶을 통하여 나타나야만 할 희생과 충성의 '자기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Sang78us@yahoo.com
10.22.2022